[오스트리아 역사 이야기] 오스트리아 노벨상 수상자 – 2편

노벨상은 다이너마이트의 발명가인 스웨덴의 알프레드 노벨이 작성한 유언에 따라 매년 인류의 문명 발달에 학문적으로 기여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상이다. 1901년부터 시작된 이 상은 물리학상, 화학상, 생리학·의학상, 문학상, 평화상, 경제학으로 부문이 나누어져, 노벨의 기일인 매년 12월 10일에 시상된다. 평화상은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나머지는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수상식이 열리며, 수상자는 수상식 약 두 달 전쯤 스톡홀름과 오슬로에서 공식적으로 발표된다. 세계적으로 높은 권위와 기치를 가지며, 국적은 일체 불문하고 수상자를 선정하는 이유로 공식 기록에는 수상자의 출생지와 사망지(사망하였을 경우)만 기록된다.

오스트리아는 21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나라로 세계에서는 10위를, 인구당 노벨상 수상자 통계는 4위로 높은 순위를 자랑한다. 특히 화학과 의학 분야에서 많은 노벨상 수상자가 나왔다. 이번 여름호에서는 오스트리아 노벨상 수상자 다섯 명을 수상 순으로 알아보겠다. 나머지는 수상자들은 다음 호에서 알아보자. 여기서 “노벨상 수상자“란 오스트리아 출생이거나 오스트리아 국적인 경우를 모두 포함한다.

 

율리우스 바그너 야우레크

율리우스 바그너 야우레크
Julius Wagner-Jauregg, 1857-1940

율리우스 바그너 야우레크는 매독에 걸린 환자에게 말라리아 환자의 피를 주입하는 방법으로 매독에 의한 마비성 치매를 치료하는 방법을 발견했다. 1927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1857년 오스트리아 벨스에서 태어난 그는 빈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1880년에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883년 빈 대학의 조교가 되어 신경계통의 병리학을 연구했고, 1889년 그라츠 대학 의학부 교수로 취임하여 정신신경과를 주관했다. 이때 갑상선종, 요오드 등의 집중 연구를 시작했다. 1993년에는 다시 빈 대학으로 돌아와 정신신경학 교수로서 신경에 관한 연구에 집중하여, 1917년 말라리아 접종이 마비성 치매의 치료에 효과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발열요법의 발견으로 1927년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카를 란트슈타이너

카를 란트슈타이너
Karl Landsteiner, 1868-1943

카를 란트슈타이너는 인간의 혈액형을 밝혀낸 공로를 인정받아 1930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1868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난 그는 빈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했다. 의학을 공부한 이후 병리학자가 되어 많은 연구 업적을 남겼다. 그는 1900년에 혈청학을 연구하다가 적혈구가 다른 사람의 혈청에 의하여 응집되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런 현상이 혈액의 종류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1901년, 사람의 혈액형을 A형과 B형, 그리고 C형(지금의 O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 1년 뒤, 1902년에는 그의 제자인 폰 드카스텔로와 스털리에 의해 AB형이라는 또 하나의 혈액형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란트 슈타이너는 1922년부터 1939년까지 미국 록펠러 의학연구소의 병리학 교수를 역임했으며, 1940년에는 비너와 함께 Rh 인자를 발견했다. Rh 항원이 있으면 Rh+형 혈액이며, Rh 항원이 없으면 Rh-형 혈액으로 분류한다. 혈액형의 중요성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려, 1930년에서야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그는 혈액형 외에도 매독에 대해서 연구했으며, 알레르기 반응이 면역계의 반응이라는 증거도 발견했다. 그의 혈액형 발견은 지금까지 약 10억 명 이상의 생명을 구한 것으로 추정된다.

 

에르빈 슈뢰딩거

에르빈 슈뢰딩거
Erwin Schrödinger, 1887-1961

1887년 빈의 Erdberg에서 태어난 그는 일찍이 수학과 과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합스부르크 왕가 왕립 학술 김나지움 입학시험에 합격하였고, 1906년 빈 대학교 물리학부에 입학하였다. 1910년에 빈 대학교를 졸업한 후에 그는 빈 대학에서 조교 생활을 했고, 그러던 중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나고 슈뢰딩거는 여러 대학의 조교, 임시 교수 등을 거쳐, 1921년 취리히 대학의 물리학 교수가 되었다. 그곳에서 이론물리학의 다양한 주제에 대해서 연구했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이라 인정받는 슈뢰딩거의 방정식은 이 시기의 마지막인 1926년에 얻어진 것이다. 슈뢰딩거는 양자 물리학에 대한 기여로 1933년에 노벨상을 받았다.

1933년에는 나치가 독일에 집권하게 되자 영국으로 망명했다가 1936년에 돌아와 그라츠 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병합하자 1938년에 로마로 망명하였다. 1939년에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아일랜드에 가서, 1940년에는 더블린 고등연구소의 이론 물리학 부장이 되었다. 1956년에 은퇴하고 조국에 돌아와 빈 대학교 명예 교수가 되었다.

 

빅토르 프란츠 헤스

빅토르 프란츠 헤스
Victor Franz Hess, 1883-1964

오스트리아계 미국인 물리학자인 그는 우주선에 대한 연구로 1936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1883년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그는 김나지움 졸업 후 그라츠 대학교에 다녔다. 박사 학위 취득 후, 10년간 빈 아카데미의 라듐 연구소에서 조교를 맡았다. 1911년과 1913년 사이에 헤스는 우주선에 관한 실험을 했다. 이 업적으로 1936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방사성의 근원인 지구로부터 멀어질수록 방사능 수치가 낮아질 것이라고 가정했다. 헤스는 직접 풍선을 타고 방사능 수치를 측정하였다. 그 연구 결과, 지상 1km까지는 방사선 수치가 감소하나, 그 위에서는 방사선 수치가 증가하며, 5km의 고도에서는 해수면에서의 방사선 수치의 두 배가 측정되었다. 이 결과는 비엔나 과학 학회지에 출판되었는데, 그의 결론은 지구 밖에서 대기로 들어오는 방사능이 있다는 것이었다. 헤스의 이 발견은 이후, 핵물리학 분야의 수많은 새로운 발견의 시초가 되었다.

1923년 그라츠 대학교로 돌아온 그는 1925년 실험물리학과 교수로 부임했다. 그후 1931년에는 인스브루크 대학에서 물리학 교수와 방사선 연구소의 소장을 맡았다가 1938년 유대인 부인과 나치의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했다. 포드햄 대학교에서 물리학과 교수로 일했으며, 1944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 때문에 그의 이름을 빅터 프랜시스 헤스(Victor Francis Hess)로 적기도 한다.

 

오토 뢰비

오토 뢰비
Otto Loewi, 1873-1961

독일 출신의 미국의 의사 겸 약리학자이다. 오스트리아에서 교수 생활을 오래 하여 오스트리아 국적을 취득하였다. 1936년에 신경 자극의 화학적 전달에 관한 연구로 헨리 핼릿 데일과 함께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오토 뢰비는 1873년 독일 Frankfurt am Mein에서 와인 양조장을 하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곳에서 고등 교육을 마치고, 뮌헨과 스트라스부르크에서 의학 공부를 했다. 1896년 독일 대학교(지금의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교)에서 의사 자격을 획득한 뒤 여러 대학교에서 연구 및 강의를 했다. 1904년 오스트리아로 이사 온 그는 오스트리아 국적을 취득하였고, 30년 가까이 오스트리아에서 교수 생활을 하였다. 1935년 신경전달 물질 아세틴콜린을 발견하며 노벨상을 받았다. 그의 발견을 통해 신경 전달 물질을 조절할 수 있는 약물을 개발할 수 있게 되었고, 치매 등과 같은 뇌 질환과 관련된 약물치료가 발전되었다.

1938년 유대인이던 그는 노벨상 상금을 포함해 모든 재산을 포기한다는 조건으로 목숨만 건진 채 영국으로 떠났다. 옥스포드 대학에서 교수로 지내다가 1940년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대학교의 교수가 된다. 1946년 미국 시민권을 받게 되었고, 그 후로도 미국에서 교수 생활을 하였다.

 

글 이예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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