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 문화유산 –

Selbstbildnisse von Rubens und Rembrandt

 

 

빈 미술사 박물관, 합스부르크 제국 문화유산의 보고인 그곳에서 마주할 수 있는 두 거장의 자화상이 있으니, 서양미술사의 한 사조를 이끌었던 루벤스와 렘브란트의 자화상이 그것이다. 루벤스의 자화상은 화려하고 웅대했던 그의 일생을 함축한 듯 위엄을 갖추었고, 렘브란트의 자화상은 중년의 그가 겪었던 역경과 그를 넘어서고자 한 의지가 고스란히 표현되어 있다. 미술사 박물관이 소장한, 바로크 사조를 대표하는 큰 인물의 두 자화상에 대하여 논하고자 한다.

 

Kunsthistorisches Museum Wien ©KHM-Museumsverband

빈 미술사 박물관은 1891년 10월 17일 오스트리아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참관 아래 개관하여 올해 130주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황제와 대공들이 수백 년에 걸쳐 수집한 컬렉션은 이집트와 그리스의 고대 유물부터 세공품과 조각 등의 진귀한 소장품들을 모아 둔 쿤스트캄머, 50만개에 달하는 주화 컬렉션, 15세기부터 1800년대까지의 독일과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그리고 플랑드르와 네덜란드의 회화 컬렉션을 아울러, 오천 년에 이르는 서양미술사를 망라한다고 자부한다. 또한 박물관을 건립할 당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비용 걱정은 말라’는 유일한 분부로 지어진 이 르네상스 양식의 우람한 건축은 아름답고 값비싼 대리석과 프레스코로 여느 미술관과 박물관보다 화려하게 장엄하는데, 그 중엔 클림트가 작업해 남긴 작품 또한 전해진다. 이러한 빈 미술사 박물관은 개관 당시부터 오늘날까지 박물관 그 자체가 유럽 문화와 예술사를 상징하는 하나의 표상이 되었다.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참관 아래 개관할 당시의 스케치, 1981 ©KHM-Museumsverband

미술사 박물관의 회화 갤러리에는 유럽의 회화를 논함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역작이 다수 전하는데, 라파엘로와 티치아노를 비롯하여 카라바지오, 베르메르, 벨라스케스 그리고 브뤼겔과 뒤러의 작품 등이 있다. 루벤스의 회화는 두 화랑을 가득 메울 정도로 다수가 전해지며 렘브란트의 회화 또한 몇 점 전하는데, 필자는 그 중에서도 오직 이 두 거장의 자화상만을 마주하러 미술사 박물관에 들기도 한다.

루벤스와 렘브란트는 플랑드르와 네덜란드라는 가까운 지역에서 나고 자랐으며 바로크 시대에 활동한 화가라는 공통분모가 있으나, 루벤스는 유럽의 전역을 다니며 활동하여 외향적인 반면 렘브란트는 네덜란드 내에서만 활동하여 내향적인 성향을 보였다. 30여 년의 세월의 차이가 나는 등 삶과 예술세계가 자못 유사하면서도 대조적인데, 그렇기에 서양음악사의 바흐와 헨델에 비유되기도 한다.

 

루벤스의 회화로 꾸려진 플랑드르 화랑(Saal XIV)
Die vier Flüsse des Paradieses, Peter Paul Rubens · Kunsthistorisches Museum Wien

 

역동적인 형세와 명암의 극적인 대조를 통하여 바로크 사조의 문을 연 카라바지오를 잇고도, 르네상스를 넘어서 플랑드르 바로크에 큰 획을 그은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는 일찍이 이탈리아로 유학을 나가 르네상스와 당대 유행하기 시작한 바로크 회화를 접하고 연구해 나갔다. 겸재 정선이 남종화법과 북방화법을 아울러 진경산수화풍을 창조해 냈듯, 루벤스는 구도와 구조에 강한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바로크 양식과 세부적 묘사에 강한 플랑드르의 전통을 융합하여 자신만의 회화적 성립을 이루어 내었다.

또한 루벤스는 역사와 종교, 신화, 풍경, 인물에 두루 능통하여 그의 서명으로 전해지는 작품 수천 점을 남길 만큼 다작하였는데,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종교적 신념과 당시의 엄격한 종교적 정세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신화를 회화화하는 담대한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웅건한 구도와 살아있는 듯한 색채, 우람하고 관능적인 육체와 살빛으로 그의 회화는 생기와 활력이 넘친다. 그는 일그러진 진주라는 뜻의 바로크에 가장 걸맞는 회화를 그려냈다.

루벤스의 생애 또한 그의 회화처럼 화려하고 웅대했다. 그는 언어와 교섭에도 능통하여 화가로써만이 아닌 사절로서의 역할까지 해 냈는데, 실지로 유럽 여러 국가 간의 평화를 위해 외교에도 힘썼으며 그 효험 또한 훌륭했다. 유럽 왕실의 예술적 욕구를 충족시키고 나아가 외교 사절로서도 그 역할이 출중했으니, 스페인의 펠리페 4세와 잉글랜드의 찰스 1세에겐 기사 칭호를 받았으며, 오스트리아의 황실로부터는 궁정 화가로 임명되기도 했다. 프랑스 부르봉 왕가로 시집온 왕비 마리 드 메디치와도 연이 닿아 오늘날 루브르에 소장된, 그녀의 일대기 연작과 같은 역작을 남기기도 했다.

이와 같은 인연으로 받은 유럽의 여러 왕실과 귀족들의 후원과 주문 그리고 그의 걸출한 예술적 능력으로 루벤스는 수많은 제자들을 거느렸고 그 중엔 반 다이크와 같은 인물도 배출한 바 있다. 루벤스는 그야말로 플랑드르 바로크의 사표로서 유럽을 호령한 큰 인물이었고, 화가로서 일가를 이룬 이였다.

 

Self-Portrait, Peter Paul Rubens 1623 · Royal Collection Trust 런던
Selbstbildnis, Peter Paul Rubens 1638/40 · Kunsthistorisches Museum Wien

빈 미술사 박물관에는 루벤스의 말년에 그려진 자화상이 한 점 전하는데, 그가 일생동안 그려왔던 회화와는 달리 웅대하지도 화려하지도 윤택하지도 아니하다. 그가 1623년에 그린 자화상과도 자못 대비된다.

화면의 구도는, 하나의 큰 기둥을 배경으로 비스듬히 서 관람자를 바라보듯 시선을 향하고 있으며 오직 모자와 장갑, 검만으로 화면을 구성했다. 당시 통풍을 앓았던 오른손엔 장갑을 끼고서 다른 한 짝의 장갑을 쥐고 있으며, 왼손은 허리에 찬 검 위에 살며시 올려놓은 듯하면서도 검지와 중지 사이를 벌리고 살며시 힘을 준 듯 긴장을 부여해 화폭 속 인물의 손에 눈길이 가게끔 화면을 구성했다. 빗겨 쓴 모자는 벗겨진 머리를 가리기 위함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 단조로운 자화상에서도 그가 평생 그려왔던 회화의 웅대한 면모가 은연히 엿보인다. 기둥과 장갑, 검, 모자는 궁중 초상의 징표이기도 하며, 배경의 큰 기둥은 스스로 일생에 쌓아 온 업적과 어느 학자와 귀족 못지않은 학식과 교양 등을 상징한다. 또한 자신의 얼굴과 함께 조명한 손을 통해, 화폭 속의 자신이 비춰진 손으로써 그와 같은 위업을 세웠다는 자부심을 드러낸 것이다. 관람자를 바라보는 루벤스의 안광 또한 여느 화가들과는 다르다는 자긍심이 엿보이나, 거만하지 않고도 위압적이지 않다.

그가 일생에 그려왔던 회화처럼 화려하지도 않으며, 사치스런 장신구 하나 없으나, 필자가 본 서구의 그 어떤 자화상들보다 우아하며 품격과 위엄을 갖추었다. 그는 생을 마감하며 그려낸 이 자화상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자신의 생애와 위업을 돌이켜 보고서, 평생토록 그려온 회화로써 후대의 인류에 전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노년의 루벤스는 오늘에도 뭇 후배 화가들과 관람자를 바라보며 화폭 속에 존재해 있다.

 

 

Self Portrait at the Age of 34, Rembrandt van Rijn 1640 · National Gallery 런던
Self-Portrait in a Flat Cap, Rembrandt van Rijn 1642 · Royal Collection Trust 런던
Self Portrait at the Age of 63, Rembrandt van Rijn 1669 · National Gallery 런던

17세기 스페인의 벨라스케스, 플랑드르의 루벤스와 더불어 바로크를 대표하는 화가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1669)는 네덜란드 회화의 황금시대를 개척했다 평가 받는다. 그는 루벤스와 달리 유학도 나가지 않았으며 오직 네덜란드 내에서만 배우고 활동했다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의 영향력은 루벤스 못지않게 범유럽적, 범세계적이며 서양회화사의 가장 위대한 화가 중 일인이라 칭송 받는다.

렘브란트가 활동하던 시기의 네덜란드는 전무후무한 황금시대를 맞이하여 어느 때보다 초상화 수요가 급증했는데, 그는 그러한 초상화로 화가로써의 명성을 얻기도 잃기도 했다. 그는 회화를 다룸에 있어 특히 빛과 어둠을 극적으로 대비시켜 드라마틱한 화면을 연출해 냈는데, 때문에 렘브란트는 빛을 훔친 화가, 빛의 연금술사라 불리기도 한다. 그가 초상화만큼의 미술사적 족적을 남긴 에칭(etching; 부식 동판화)에서도 명암을 적극 활용하여 그 명성과 작품들은 자신이 넘지 않았던 네덜란드의 국경을 넘나들었고, 종교화와 역사화에도 또한 많은 걸작들을 남겼으며, 고루하고 엄격한 형식을 타파하는 등 후배 화가들에 큰 귀감이 되었다. 무엇보다 렘브란트는 서양의 화가 중 가장 많은 자화상을 그려 남겼는데, 그의 서명이 확실한 유화 자화상은 40여 점에 이르고, 스케치와 에칭을 포함하면 그 수는 백여 점에 달한다고 알려져 있다.

이러한 자화상들은 렘브란트의 회화에 있어서 그리고 서양미술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뭇 후대의 화가들과 오늘날의 미감에까지 큰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청년기의 자화상들은 연습과 실험 그리고 마케팅 등의 이유로 그려졌고, 중년에는 다시없을 고난을 맞으며 자신의 내면과 화가로서의 의지를 그렸으며, 말년에 다가갈수록 인간 본연에 대한 성찰을 그려낸 듯한데, 1669년 그 삶을 마치기 직전까지도 자화상을 그려 남긴 이가 렘브란트이다. 이러한 수십여 점의, 일생동안 그려낸 자화상들을 마주하고 있자면 마치 그가 붓으로 그래낸 그의 자서전을 읽는 듯 렘브란트의 생애와 예술세계가 눈앞에 펼쳐진다. 렘브란트의 깊은 내면적 성찰, 자신의 예술에 대한 자부심과 예술에 대한 의지가 없었다면 우리는 이와 같은 예술세계를 향유할 수 없었을 것이다.

 

Großes Selbstbildnis, Rembrandt van Rijn 1652 · Kunsthistorisches Museum Wien

미술사 박물관은 그의 회화를 열 점가량 소장하고 있는데, 어느 부부의 초상 한 쌍과 렘브란트 아들의 초상, 어머니의 초상 그리고 그의 자화상 석 점 등이 있다. 그 중 렘브란트의 이 자화상은 당시 그가 겪고 있던 고난과 고뇌,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 화가로서의 길에 당당히 나아가고자하는 자신감과 굳건한 의지가 엿보이는 렘브란트 중년기의 대표적 자화상이다.

렘브란트는 이른 나이에 그 명성을 떨쳤고 예술가로서 성공의 가도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러한 여건과 자부심이 그의 장년 자화상에 여실히 드러나 있는데, 화려한 옷가지를 비롯해서 사치스런 장신구들, 그의 표정과 포즈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러나 1642년 아내와의 사별 직후 찾아온 개인적 비극과 경제적 난관은 말년까지 이어졌고 1656년엔 파산을 선고하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그가 소유했던 부동산과 스스로에 예술적 영감을 주었던 수많은 진귀한 소장품들을 내놓아야만 했는데 그 중엔 루벤스의 작품도 있었다 한다. 그러나 렘브란트는 이러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이 자화상을 그리던 46세의 렘브란트는 그가 겪었던 고난의 정점에 서 있었다. 그럼에도 렘브란트는 그러한 스스로의 처지를 감추려 하지 않았다. 사치스러움이 엿보였던 일전의 자화상과는 달리, 남루한 작업복 차림을 한 중년의 렘브란트는 노화된 스스로의 얼굴을 있는 그대로 그렸고, 그 얼굴에 조명을 비추었다. 또 두 손은 허리춤에 걸치고서 역경에 맞서고자하는 의지를 내보이듯 당당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또한 이 자화상에 붙여진 이름과 같이 다른 자화상들 보다는 다소 큰 크기의 캔버스에 그려졌는데 이 또한 그 의지의 반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관람자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자신의 여느 자화상보다도 강렬한데, 마치 마주한 역경을 이겨내고야 말겠다는 다짐을 그의 눈동자에 투영시킨 듯하다. 그가 서양미술사의 위대한 화가로서 그리고 네덜란드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일인으로 꼽히는 것은 이러한 의지와 그를 이처럼 예술로써 승화시켰기 때문이라.

 

 

 

이와 같은 두 거장의 자화상은 오늘날 빈 미술사 박물관에 소장되어 400여 년 후의 관람자에게도 귀감이 되고 나아가 예술적 영감을 선사하고 있다. 이 두 자화상은 스스로 자신을 그린다는 자화상의 의의가 어떠한 것인지, 인류의 역사와 그들의 생애를 그리고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한다. 스스로 어떠한 생애와 세계를 창조해 내고 있는가. 자신을 그린 자화상으로써 두 거장은 우리에게 화두를 던진다.

 

글 三樂(삼락) 박민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