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네 아름다움 –

肖像, 그려진 精神

 

 

조선은 의궤와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 방대한 기록유산을 남겨 기록의 나라 일컬어지곤 한다. 조선이 가진 또 하나의 별칭이 있으니, ‘초상화의 나라’가 그것이다. 그려 남긴 기록이라 할 수 있는 초상화를 조선왕조 오백년간 임금부터 공신, 유림, 고승, 여인에 이르기까지 수백수천여 명의 면면을 기록해 남겼다. 고구려의 고분벽화로부터 고려 불화를 거쳐 조선으로 이어지는 한국의 초상화는 조상을 숭배하는 유교적 이념과 맞물려 더욱 발전하게 되는데, 그 예술적 완성도는 당대의 중국과 일본 나아가 유럽의 초상화들과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다.

기운생동(氣韻生動)이라는 개념이 있다. 말 그대로 대상의 기품과 정취가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는 말로, 동양화를 평함에 있어 하나의 기준이 되는 개념이다. 조선의 초상화는 여느 나라의 초상화보다 기운생동한데, 그 연유는 초상을 그리는 조선의 화가들이 있는 그대로의 외모뿐 아니라 정신까지 그려 내야 했고, 터럭하나 달라도 다른 이라고 여겨 극사실적인 표현을 지향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초상을 그려 남긴 초상화의 나라, 초상화의 왕국인 조선의 위대한 문화유산이자 기운생동하는 예술작품, 그 그려진 정신에 대하여 논하고자 한다.

 

전신사조, 일호불사 편시타인

초상이란 닮을 肖, 모양 像자를 써 사람의 얼굴이나 모습을 그림 등으로 나타내는 것을 일컫는다. 그러한 초상을 그림에 있어 조선의 화가들은 엄격한 기준을 내세우고 다양한 기법을 활용했다. 먼저, 전신사조(傳神寫照)라 하여 그려지는 사람의 형체뿐 아니라 정신까지 그려 낸다는 예술적 규범을 세웠는데, 화폭에 당시의 사상적 근간을 이룬 유학과 성리학의 정신 그리고 그를 삶에 오롯이 투영하는 인물의 세계관을 담아내려 했던 것이다.

또한, “一毫不似 便是他人; 터럭 하나 달라도 다른 이”라는 문장이 또 하나의 기준이 되었다. 본래 송대의 유학자 정이가 주창한 것으로, 인물과 똑같이 그려 내기는 어렵다는 의미로 쓰여 중국에선 초상화가 다소 덜 그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오히려 이 문장으로 하여금 화가들에 초상화를 더욱 사실적으로 그려 내게끔 한 것이다.

이러한 엄격한 기준을 충족시키기 위해 사용된 대표적 기법 중 하나가 바로 배채(背彩)이다. 배채란 초상화 화면의 뒷면에 채색을 하는 기법으로써 조선시대 초상화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이다. 이 배채 기법으로, 뒷면에 채색한 색이 앞면으로 자연스레 투과되어 맑고 은은한 얼굴빛을 표현할 수 있었으니, 이로써 더욱 사실적인 인물 묘사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토록 엄중한 기준과 뛰어난 기법으로 그려 낸 조선의 초상화가 얼마나 사실적인지 입증하는 한 일화가 있다. 2011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초상화의 비밀> 특별전은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 그리고 서양의 초상화 200여점을 출품하여 비교 및 감상할 수 있는 대규모 전시였는데, 이 특별전을 방문한 의학박사들이 우리네 어른들의 초상만을 보고서 어디가 편찮으셨을 것이며 어느 지병을 앓으셨을 것이라 논하였다 한다. 그런데 이를 기록과 비교하여 보니 실지로 일치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초상만을 마주보고 그려진 이의 질병을 진찰할 수 있을 만큼 사실적으로 그려 낸 것이다.

이와 같이 사실적으로 그려진 조선의 초상화는 크게 임금을 그린 어진, 공을 세운 신하를 그린 공신상과 사대부의 초상, 당대의 유림을 이끌었던 거유의 초상, 스스로를 그린 자화상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필자는 그 중에서도 그 범주를 대표하며 그 시대를 대표하는 초상 몇 점만을 선별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임금의 초상, 어진

太祖御眞 · 경기전

조선왕조 오백년의 세월 동안 조선시대 초상화의 모범이 되고 표본이 된 것이 바로 임금을 그린 어진(御眞)이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어진이 대표적인 작품인데, 그 위상에 걸맞게 여러 점 그려지고 전주의 경기전과 경주, 개성, 평양 등의 주요 지역에서 또한 뫼셔졌다. 기록으론 26점이 그려졌다고 하나 오늘날 온전한 형태로 전해지는 것은 고종9년(1872)년에 모사된 이 태조어진(국보 제317호)뿐이며, 불에 그을린 채 전해지는 태조의 어진 한 점이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태조의 용안을 자세히 살피면 이마에 자그마한 피부병변이 나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한 나라를 건국한 이의 얼굴을 숨김없이 있는 그대로 그린 것이다.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의 미화된 초상과 잉글랜드 헨리 8세의 과장된 초상과는 자못 대비된다. 실록의 기록 중에도, 초상의 모델이 된 왕세자가 얼굴에 뾰루지가 났으니 이를 그리지 말라 명하였으나 그를 맡았던 화원은 그럴 수 없으니 날을 뒤로 미루어 달라고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는 또한 조선시대의 초상이 얼마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그리려 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太祖御眞 · 국립고궁박물관

 

英祖御眞 · 국립고궁박물관

이처럼 국가적 차원에서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조선왕조의 어진을 논함에 있어 가장 안타까운 역사적 사실은 임진왜란과 같은 전란에 조선 전기의 어진들이 손괴되어 전해지지 않는다는 것과, 한국전쟁 당시 궐에 모셨던 모든 어진을 전란을 피해 부산으로 함께 모셨으나 모셨던 용두산의 대화재로 인하여 일부는 불에 타 소실되고 몇 점은 심하게 훼손된 상태로 전해진다는 것이다.

영조대왕이 왕자일 시절 그려진 연잉군 초상과 철종의 어진을 보면 그 화마의 흔적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연잉군 초상은 영조가 임금이 되기 이전 그려진 왕자의 초상이라는 점, 철종 어진의 경우 다른 어진들과 달리 무관의 복장인, 구군복 차림이라는 점으로 학문적 연구에 있어 매우 귀중한 역사적 자료가 되고 있다. 두 초상 모두 불에 심히 훼손되었으나 주요한 부위는 보존되어 오늘날 왕실 초상화 형식의 기준작으로 남아 있다.

延礽君肖像 · 국립고궁박물관 · 哲宗御眞

 

大院君肖像 · 서울역사박물관

조선시대, 임금의 생부로 대원군에 추숭된 네 분이 계시니 덕흥대원군, 정원대원군, 전계대원군 그리고 흥선대원군이다. 그러나 실지로 대원군으로서 군림한 이는 흥선대원군, 석파 이하응이 유일하다. 그와 같은 위세에 어진 못지않게 그려진 대원군의 초상이 여러 점 전해지는데 서울역사박물관에 소장된 금관조복본, 흑단령포본, 흑건청포본, 와룡관학창의본, 복건심의본 다섯 점과,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금관조복본이 그것이다. 이처럼 다양하고 온전한 형태로 전해지는 왕실 초상은 드문데, 당시 조선말 최고의 어진화사(御眞畵師) 이한철이 그렸다는 높은 예술성 또한 지니고 있다. 서울역사박물관에 소장된 다섯 점에는 대원군 스스로 제한 휘호가 함께 있어 격을 한층 드높이고도 그려진 연원과 시기를 알 수 있다. 조선 왕실 초상의 마지막 위엄과 품격을 내보인다.

大院君肖像 · 서울역사박물관

 

 

유림의 초상

尤庵 송시열 肖像 ·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은 군주와 사대부가 함께 이끌어가는 나라였다. 그 중심에 유림이 있었고 정신적 사상적 버팀목이 되었다. 퇴계 이황, 율곡 이이 등 조선왕조 오백년간 수없이 많은 거유들이 유림과 조정을 이끌었으나, 조선 전기에 그려진 유림의 초상은 매우 드물다. 조선 후기로 접어들며 그려지고 전해지는 유림의 초상은 다소 더 많은데, 그를 대표할 수 있는 작품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우암 송시열 선생의 초상(국보 제239호)이다. 선생은 노론의 영수이자 주자학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문묘와 종묘에 배향된, 그야말로 당대의 사상계와 정치계를 호령했던 큰 어른이었다. 초상의 화폭에서 선생은 유학자의 평상복인 심의(深衣)를 입고 복건(幅巾)을 쓴 차림인데, 의복을 오직 흑백으로만 구성하여 유학자적인 면모를 더욱 담백하게 그려내었고 인물의 얼굴과 몸가짐은 선생이 살아온 생애와 학풍을 오롯이 담아낸 듯 정중하다.

이 초상이 더욱 존귀한 것은 우암 선생께서 스스로 자찬한 제시와 더불어 정조대왕이 직접 이 초상을 알현하고 지은 제시가 함께 전해지기 때문이다. 선생의 제시와 정조대왕의 어제는 다음과 같다.

麋鹿之群  고라니 사슴과 무리이루고
蓬華之廬  봉애가 무성한 초가집이매,
窓明人靜  창은 환하고 인적 고요하니
忍飢看書  굶주림을 참으며 책을 읽네.
爾形枯臞  네 모습은 쇠하여 여위였고
爾學空踈  네 학문은 비어서 거칠지만,
帝裏爾負  천제의 마음을 네 저버리고
聖言爾侮  성인의 말씀이 네 조롱하니.
冝爾置之  마땅히 그대는 단언컨대
蠹魚之俉  책벌레를 맞이하리오.

崇禎紀元後辛卯  신묘년(1651)
尤翁自警于華陽書屋 
우옹이 화양서옥서 스스로 깨우치다

 

御製 正廟朝

節義干松高  절의의 줄기 소나무처럼 높아
平生我敬重  한평생 내가 존경함이 중한데,
烈祖屡展崇  조상의 업적 두루 나아가 높으니
世林孰不聳  사림 중에 뉘 공경하지 않으리오.
橫堅皆當理  굳세고도 자재로이 모두 이치에 합당하여
蔚然理學宗  그 빼어남은 성리학의 으뜸인데,
不盡經淪業  학문하는 업을 다하지 못하고
吁嗟叔季逢  아아 슬프도다 숙세 잘못만났네.
洛中祠屋在  한양 가운데 선생 사당이 있어 찾아뵈니
遺像肅淸高  전해진 초상 엄숙하고도 맑으며 고고하매,
衿佩盈庭會  금패를 차고서 더불어 모이여
承宜尊一醪  받들어 마땅히 술을 올린다.

崇禎紀元後再戊戌三月 
숭정 기원후 두 번째 무술년(1778) 셋째 달
追製於萬機之暇 
정무기틀의 틈새에 선생을 쫓아 짓다

 

眉叟 허목 肖像 · 국립중앙박물관

우암 선생과 동시대의 어른으로, 당파 간 라이벌 관계에 있기도 했던 미수 허목 선생의 초상(보물 제1509호)이 또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남인의 영수였던 선생은 예학에 도통했고 원시유학과 육경학 등 고학에 경지를 이루었으며 도가와 불가의 사상 또한 섭렵했다. 조선의 서예사를 논함에 있어서도 선생의 이름을 빼놓을 수 없는데, 미수전(眉叟篆)이라는 용어가 만들어질 정도로 전서체에 능통했다. 선생의 초상은 시복(조선시대 관원들이 공무를 볼 때 입는 관복으로 흉배가 없는 홍단령을 뜻함) 차림이며, 눈을 덮을 정도로 눈썹이 길어 지었다는 선생 아호 미수처럼, 선생의 희고도 수려한 눈썹을 화폭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선생의 초상은 당대에 초상화가로 큰 업적을 남긴 화원 이명기가 그려 낸 작품으로, 정조대왕의 명을 받은 영의정 채제공이 선생의 초상을 구하여 이명기에게 이모하게 했다는 연원을 당시 함께 제한 글에서 알 수 있다. 다음은 미수 선생 시복본 초상에 제한 채제공의 문장 전문이다.

十八年甲寅, 上曠感眉叟許文正, 欲得七分小眞以覽, 乃 命臣濟恭, 臣與土林議, 乃於秋七月辛亥, 自漣上恩居堂, 奉先生八十二歳眞入京師, 使當世善畵者李命基, 模以進, 上覽之, 別備綃 命命基, 移模作貼, 置諸大內, 所進本還下其後孫, 於是士林合辭言: 曰 “嶺南鄒魯鄕也, 況順興之白雲洞, 奉孔聖曁四聖十哲七十子寶幀, 我朝如周慎齋, 李悟里先生影本倶在焉. 今是眞也, 非是歸將之安之乎?” 議遂合, 奉詣于順興書院以安之, 鳴呼! 今天下陸沈, 吾道東東而盡在於南, 今先生之眞, 又南矣, 此天之意也, 豈人力所使然哉! 況梧里卽先生之師友知己, 易: 曰 “同聲相應, 同氣相求”, 聖人不我欺也, 不亦奇哉! 標題卽濟恭所書, 直書先生姓諱者以仰備, 御覽而然也, 記之使後之祗謁者知其事焉

열여덟째 해 갑인년, 성상께서 미수 허 문정공에게 크게 감동 받아 초상을 보고파 하셨다. 이에 신 채제공에게 명하시매, 신은 사림과 더불어 논하여 칠월 신해일 연천의 은거당에서 선생의 팔십이세진을 모시고서 한양으로 들었다. 그리고서 당대의 명화원 이명기에게 모사하게 하여 올리었다. 성상께서 이를 보시고는 따로 비단을 마련해 이명기에게 이모하게 하고 첩으로 제작하여 대궐 안에 두고서, 성상께 올렸던 초상은 후손에게 돌려주도록 하였다. 이에 사림들은 뜻을 합하여 아뢰기를: “영남은 추로지향이매, 하물며 순흥의 백운동에는 공자와 사성, 십철, 칠십이제자의 화상을 봉안하고 있고, 우리 조선의 인물로 신재 주세붕, 오리 이원익 선생의 초상이 모두 그곳에 있다. 이제 이 초상이 그곳으로 돌아가 봉안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마침 의견을 합하여 초상을 받들고 순흥의 서원에 안치하였다. 오호라! 지금 천하의 도가 속세에 잠겨 있는데, 우리네 도는 동방으로 오더니 모두 남녘에 있구나. 이제 선생의 초상이 다시 남쪽으로 가니 이는 하늘의 뜻이다. 어찌 인력으로써 그렇게 되었겠는가? 하물며 오리 선생은 선생의 사우이자 지기임에랴. 주역에 이르기를: “같은 소리는 서로 응하고, 같은 기운은 서로 구한다” 했는데, 성인께서는 나를 속이지 않으셨구나. 기이하지 아니한가! 표제는 채제공이 썼으며, 선생의 성휘를 직접 쓴 것은 어람에 대비함이다. 이를 기록하여 후대에 알현하는 이들이 그를 알 수 있도록 함이로다. 

是年菊秋望日後學原任領議政蔡濟恭七十五敬題
이 해 국화 피는 가을 보름에 후학 원임영의정 채제공 칠십오세에 삼가 제함

眉叟 허목 肖像 · 국립중앙박물관 | 尤庵 송시열 肖像 · 삼성미술관 Leeum

이와 같이 당대를 이끌었던 조선 거유의 초상은 생전뿐 아니라 후세에도 여러 점 그려지고 모셔져 오늘날 다수가 전해진다. 우암과 미수, 두 어른의 경우에도 반신상과 전신좌상, 전신상 등이 존재한다. 이렇듯 그려지고 모셔진 유림의 초상은, 신주 봉안을 원류로 하는 본래의 성리학 이념과는 달리, 조선에 정착되고 발전되어 또 다른 전통으로 자리매김했다.

 

 

공신의 초상

樊巖 채제공 肖像 · 수원화성박물관

앞서 소개한 미수 허목의 초상에 제시를 짓고 쓴 번암 채제공은 영정조대의 명재상으로, 정조대왕의 개혁정치를 보필하며 영의정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그의 초상 또한 다수가 전해지는데, 대표적인 것이 수원화성박물관에 소장된 시복본 초상(보물 제1477-1호)이다. 공이 입은 시복을 보면, 안감의 푸른빛이 자연스레 비치어 마치 실제 의복을 보는 듯한데, 당대 조선의 회화적 역량을 여실히 살필 수 있다. 무엇보다 이 초상에서 눈길이 가는 것은 화폭 속 인물의 두 눈이다. 사시였던 채제공의 두 눈을 있는 그대로 그린 것인데, 영의정에 올라 당대를 호령하던 인물도 일말의 예외 없이 사실만을 기록해 그렸던 것이다. 이로써 다시 한번, 조선이 초상화에 있어서 얼마나 그 기준과 전통을 엄격히 지켜왔는지를 알 수 있다.

화면의 우측 상단에는 그려진 해와 그 연원을, 바로 아래에는 이 초상을 그린 이가 이명기라 밝혀 놓았다. 또한 이 초상을 더욱 특별하게 하는 것이, 번암의 손에 쥐어진 부채와 향낭, 그리고 왼편 상단에 채제공 스스로 짓고 써 남긴 제시이다. 제시에서, 손에 쥔 부채와 향낭이 정조대왕으로부터 하사받은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고, 삶을 돌이켜 보는 감회로 스스로와 후대에 전하는 성찰을 읽을 수 있다.

爾形爾精 父母之恩
爾頂爾踵 聖主之恩
扇是君恩 香亦君恩
賁飾一身 何物非恩
所愧歇後 無計報恩

樊翁自贊自書

네 몸과 네 정신 부모의 은혜요
네 머리부터 발끝까지 성상의 은혜로다
부채도 군의 은혜 향낭도 군의 은혜이니
이 한 몸을 두룬 것 은혜가 아닌 것이 없구나
부끄럽다 물러나 갚을 은혜 헤아리지 못하네

번옹 스스로 찬하고 스스로 쓰다

樊巖 채제공 肖像 · British Museum 런던 | 樊巖 채제공 肖像 · 수원화성박물관

 

醇庵 오재순 肖像 · 삼성미술관 Leeum

번암의 초상과 더불어 당대의 명화원 이명기가 그렸다 전해지는 또 하나의 수작이 삼성미술관 Leeum에 소장된 순암 오재순의 초상(보물 제1493호)이다. 순암 오재순 또한 정조대에 활동한 인물로 대제학과 이조판서를 거쳐 판중추부사에 오른 문신이었다. 그의 초상은 여느 공신과 사대부의 초상과는 달리 정면을 응시하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인물화에 있어서 정면상은 그려 내기가 매우 힘들다고 한다. 또한, 당시 중국을 통해 전래된 서양의 화법을 일부 적용하면서도 본래의 전통을 잃지 않았으며, 명암을 효과적으로 다루어 더욱 입체적인 인물상을 표현해 냈다. 조선 후기 초상화가 도달한 경지를 입증하는 수작이며, 실제 순암 문정공을 뵙는 듯, 우리네 어른들이 어떠한 사상과 문화를 향유했는지 두 눈으로 직접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醇庵 오재순 肖像 – 부분

 

 

자화상

恭齋 윤두서 自畵像 · 해남윤씨종가 녹우당

조선의 초상을 논함에 있어서 필히 논해야 할 두 자화상이 있으니 바로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과 표암 강세황의 자화상이다. 공재 윤두서는 해남윤가의 녹우당에서 나고 삶을 마쳤는데, 시가로 이름이 높은 고산 윤선도가 그의 증조부이며, 다산 정약용이 그의 외증손자이기도 하다. 공재는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일찍이 고향으로 돌아와 문인으로서 삶을 영위하였고, 서화에 능통하여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과 더불어 조선 후기의 삼재(三齋)로 불리었다. 화가로서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조선의 민중을 화폭에 옮기고, 중국풍이 주류를 이루던 조선의 화풍에 우리네 생활상을 그려 냄을 통하여 단원과 혜원의 풍속화가 발달할 수 있는 토대를 이룬 것 그리고 불후의 명작인 자신의 자화상을 그려 남긴 것이다.

공재의 자화상(국보 제240호)은 가로 20.5cm 세로 38.5cm의 다소 작은 크기의 종이 위에 그려진 초상으로, 얼굴 부분만을 비중 있게 다루었다. 머리 위에 쓴 탕건은 과감히 생략하고 의복 또한 그리지 않은 것으로 보이나 X선 촬영을 통해 의복의 도안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오히려 오늘날 전해지는 바와 같이 그의 안면만으로 화폭이 가득 차 있어 더욱 박진감을 주는 듯하다. 무엇보다 이 자화상에서 가장 압권인 것은 공재의 안광이다. 마치 그를 실제로 마주한 듯 눈빛이 생동하고도 강렬한데, 조선 선비의 기개를 느낄 수 있게끔 한다. 한 올 한 올 정성스레 그린 듯한 그의 수염 또한, 터럭 하나 달라도 다른 이라 여긴 조선 초상의 전통을 다시금 입증해 준다. 이와 유사한 특징과 형식으로, 서양미술사의 대표적 자화상인 뒤러의 작품과 비견되기도 한다.

Selbstbildnis im Pelzrock, Albrecht Dürer · Alte Pinakothek 뮌헨

 

豹菴 강세황 自畵像 · 국립중앙박물관

표암 강세황은 예원의 총수로서 영정조대에 활동한 문인화가이다. 그는 시, 서, 화에 모두 뛰어나 삼절로서 이름이 높았으며, 안목 또한 높아 수많은 화평을 남겼고, 단원 김홍도의 스승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가 71세의 나이에 스스로 그렸다 전해지는 표암의 자화상(보물 제590-1호)은 그와 같은 명성을 입증하듯 높은 예술성을 자랑한다.

특이한 것은 표암의 의관이 다소 어색하다는 것인데, 화면상에서 그가 쓰고 있는 것은 관리가 조정에 나갈 때 쓰는 오사모이고, 그가 입고 있는 것은 선비의 평상복인 도포인 것이다. 표암이 이와 같이 의관을 뒤바꿔 그린 이유를 스스로 지어 쓴 찬문에 밝혀 놓았는데, 자신의 명성은 조정에까지 이를 정도로 조선의 문예를 아우르나 자신의 거처는 초야에 있으니 이와 같은 처지와 조선 예원의 총수라는 자부심을 스스로 그리고 스스로 찬했다는 ‘자화차찬’의 자화상으로써 한껏 드러낸 것이다.

彼何人斯 鬚眉晧白 頂烏帽 披野服 於以見心山林而名朝籍 胸藏二酉 筆搖五嶽 人那得知 我自爲樂 翁年七十 翁號露竹 其眞自寫 其贊自作

歲在玄黓攝提格

저 사람은 뉘인가? 수염과 눈썹이 새하야며, 머리에는 오사모를 쓰고 야복을 걸쳤네. 이로써, 마음은 산림에 있지만 그 이름이 조정에 오른 것을 알겠구나. 가슴속에 수천권의 서책을 품고서, 필력은 오악五嶽을 흔드누나. 세인들이 어찌 알겠는가, 스스로 즐길 뿐이로세. 늙은이의 나이는 일흔이며, 호는 노죽露竹이라하네. 이 진을 스스로 그리고, 그를 스스로 찬한다.

때는 현익섭제격玄黓攝提格(정조육년, 1782)일세.

 

표암의 조부와 부친이 기로소(70세가 넘은 정이품 이상의 문관을 예우하기 위한 기구)에 들고 표암 또한 기로소에 들었으니 그의 가문은 대대로 영예를 누렸다 할 수 있다. 이처럼 3대가 기로소에 든 예는 드문데, 삼세기영지가(三世耆英之家)라는 위상에 걸맞게 대대로 그려진 초상이 여러 점 전해진다. 표암의 부친부터, 표암 자신, 그의 아들과 손자 그리고 몇 해 전 미국으로부터 되찾아온 그의 증손자의 초상이 모두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 그 중 그의 손자인 약산 강이오의 초상이 또한 뛰어난 예술성을 자랑하는데, 더불어 우측 상단에 쓰여진 추사 김정희의 찬이 멋을 더한다.

若山 강이오 肖像 · 국립중앙박물관

 

 

이채의 초상

華泉 이채 肖像 · 국립중앙박물관

뭇 미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이 조선을 대표하는 초상이라 찬탄해 마지않으며, 필자 또한 여느 작품에 앞서 가장 아끼는 조선의 초상이 있으니, 이채의 초상(보물 제1483호)이 바로 그것이다. 화천 이채는 조선조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우봉(牛峯), 자는 계량(季良),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그는 영조오십년(1774)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고 여러 벼슬을 거쳤으나 잠시 귀향해 지내며 학문에 힘쓰다 정조십사년(1790)에 다시금 벼슬에 올라 여러 관직을 지내고 경연관과 호조참판, 한성좌우윤 및 동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했다. 화천은 화폭에서 심의를 입고서 정자관을 쓴 채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데, 오색으로 화려한 세조대가 또한 눈에 띈다. 수려한 용모와 그의 형형한 눈빛은 이백 년이 지난 오늘에도 여여하고, 단정하고도 엄정했던 화천의 생애와 학풍 또한 여감 없이 보여 내니, 이 하나의 초상을 통해 조선 선비의 오롯한 품위와 격조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이 작품은 비록 그린이가 누구인지는 명확치 않으나, 분명 조선의 정신과 조선의 문화를 아름다이 그려낸 걸작 중의 걸작이라.

조선시대 초상화의 정수로 꼽히는 화천의 초상은 그 초상과 더불어 이채 스스로 지은 찬문과 그의 벗들이 짓고 당대 명필의 휘호로 써 남긴 글이 함께 재하니, 문장과 회화가 한데 어우러져 화천의 생애와 학풍을 더욱 실감나게 전한다. 화면의 우측 상단엔 이채가 스스로 짓고 이한진이 단정한 전서로 쓴 찬문이 있으며, 좌측 상단에는 그의 벗 유한준이 찬하고 유한지가 쓴 찬문, 원교노인이 찬하고 유한준이 쓴 찬문이 있다. 다음은 그 세 찬문의 원문과 해석이다.

彼冠程子冠, 
衣文公深衣, 
嶷然危坐者, 
誰也歟. 
眉蒼而鬚白, 
耳高而眼朗. 
子眞是李季亮者歟. 
考其迹則三縣五州, 
問其業則四子六經. 
無乃欺當世而竊虛名者歟. 
吁嗟乎. 
歸爾祖之鄕, 
讀爾祖之書. 
則庶幾知其所樂, 
而不愧爲程朱之徒也歟. 

華泉翁自題, 京山望八翁書.

정자관程子冠을 쓰고 
주문공朱子의 심의深衣를 입고서, 
꼿꼿하고도 단정히 앉아 있는 이 누구인가? 
눈썹은 짙고 수염은 희며, 
귀는 높고 눈은 밝구나. 
그대가 진정 이계량李季亮인가? 
그 행적을 살펴보면 세 현과 다섯 주를 다스렸고, 
그 학업을 물어보면 사서四書와 육경六經인데. 
당대를 속이고서 헛된 명성을 훔친 자는 아닐련가? 
아아! 
그대 선조의 고향으로 돌아가, 
그대 조부 이재李縡의 글을 읽으리라. 
그러하면 그 즐거움을 앎에,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문도門徒가 되기에 부끄럽지 않으리오. 

화천옹華泉翁 직접 짓고, 팔십을 바라보는 늙은이 경산 李漢鎭이 쓰다.

華泉 이채 肖像 – 부분

峩冠博帶 宛周旋乎禮法之場
皓髮魁儀 覿髣髴兮山墅之容
不自以爲高而高出於凡
不自以爲淸而淸在其中
是蓋世類攸好也
不可誣者有自之泉芝
家訓所受也
其爲學則相傳之箕弓
若是者吾不知誰歟
其人其惟吾友
五十九歲之華泉翁乎

著菴七十二歲翁讚綺園書

높은 관모 넓은 각대, 완연히 예법의 마당서 노닐 듯 
흰 터럭 헌칠한 거동, 뵈면 산 들의 모습과 흡사하네. 
스스로 높다 생각치 아니하나 고고함 범인보다 낫고 
스스로 맑다 여기지 아니하나 청명함 그대안에 있네. 
이는 곧 기상으로 세인을 보담을 바 
속일 자 없는것은 연원이 있기 때문. 
가문의 가르침 배우고 받들어 
대대로 그 학문을 서로 전했네. 
이 사람은 뉘인고? 
그 사람은 나의 벗, 
오십아홉의 화천옹일세. 

일흔둘 노인 저암著菴 유한준이 찬하고 기원綺園 유한지가 씀

 

豈弟得乎爾性
精粹著乎爾容
歛少日英發之氣
加中歳經術之工
終日相對而未覺其厭
終身與交而益見其篤
外貌之清和畵者能寫
衷操之剛介其友能識
嘗拜陶菴先生遺像
蓋知此精神之彷佛

圓嶠老人 贊
松園 丁卯 書

기상 화평하고 단아함은 그대 성품을 이루고
순수하고 깨끗함이 그대 용모에 나타나 있네.
발랄한 젊은 기상 거두어 내고서
중년에 경술 공부를 더 닦았으니
종일 대하고도 싫지 아니하고
평생 사귀어도 더욱 돈독하네.
맑고 순한 외모 화자가 능히 그려냈고
강직하고도 굳센 절의 벗이 알아줄 터
일찍이 도암 선생의 유상 배알하였으매
이 정신 조부와 닮았음을 알 수 있누나.  

원교圓嶠노인이 찬하고,
송원松園이 정묘년에 씀

 

陶菴 이재 肖像 · 국립중앙박물관

이재의 초상으로 전해지는 또 다른 조선시대 초상의 표상이 있다. 도암 이재는 이채의 조부로, 조선 후기에 대사헌과 대제학, 이조참판을 역임하고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여 당대 낙론(洛論)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그의 초상이 또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유학자의 올곧고 똑바른 풍모를 화폭에 아름답게 담아낸 작품이다. 그러나 이 초상이 이재의 초상이라는 명확한 기록이 전해지지 않아, 일찍이 한국의 미술학계에선 조선시대 초상화를 대표하는 두 작품의 인물이 동일인인가에 대한 논쟁거리가 오랫동안 있어왔다. 미학자 오주석은 일찍이 이 <이재초상>을 이채의 초상이라 주장했고, 이에 피부과의이자 의학자인 이성낙 교수가 의학적으로, 얼굴연구가인 조용진 교수가 해부학적으로 그 주장을 뒷받침해 줬다. 아울러 오랫동안 초상화를 연구한 조선미 교수 또한 두 초상의 인물은 한 사람이라 주장했고, 오랜 기간 초상화에 대해 기고를 써 온 배한철 기자도 동일 인물임을 추측했다. 무엇보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재초상>은 <이채초상>보다 후대에 그려진 것이라 추측했고, 또한 <이채초상>을 참조하여 <이재초상>을 다시 그려낸 것이라는 주장이 현재까지는 우세한 입지이다.

미학자 오주석은 이 두 초상을, 인류 회화를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최정상급의 초상화라 칭송하며 렘브란트의 걸작들과 비견하기도 했는데, 두 초상의 인물을 비교함에 있어 의학박사와 해부학박사의 조문을 받아 두 인물을 동일인이라 논한 그의 주장을 학술적으로 뒷받침했다. 특히 이성낙 전 가천의대 총장의 의학적 연구가 주목해 볼 만한데, 초상화 속 인물의 검버섯과 주름, 수염의 위치와 변화 과정 등을 분석한 결과, 두 초상화는 같은 사람을 10여 년의 시차를 두고 그려진 그림이라 판명했다. 무엇보다 눈꼬리부분에 자리 잡은 도톰한 지방종이 표재성피부지방성보반(表在性皮膚脂肪性母斑, Nevus lipomatous cutaneus superficialis)이란 비교적 희귀한 피부병변임도 확인하였다. 조선시대 초상화가 매우 과학적이며 정밀하게 그려졌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근거라고도 주장했다.

이성낙 교수의 또 다른 연구에 따르면, 이와 같이 조선시대 초상화에 그려진 피부병변은 흔히 찾아 볼 수 있는 것이라 한다. 500여점의 조선시대 초상을 두루 살펴보니 피부병변이 없는 초상은 2할이 채 되지 않았다고 한다. 다시 말해 8할 이상의 초상에 인물의 피부병변을 있는 그대로 그렸고, 이는 세계 어느 나라의 초상화 문화에서도 찾기 힘든 사례라 했다. 이성낙 교수는 조선시대의 초상화가 이처럼 사실적으로 그려졌기에 역사적 예술적 가치를 넘어서 의학적 연구에도 큰 가치가 있다고 논했다.

두 초상의 인물이 동일한 부위에 동일한 피부병변을 가진 것으로 그려져 있으며, 이는 의학적으로 유전되기 힘든 사례라 한다.

 

 

근대의 초상

石芝 최익현 肖像 · 국립중앙박물관

시대가 근대로 접어들며 초상의 전통과 창작 또한 점차 저물어 갔다. 그러한 시기의 끝자락에 조선의 마지막 초상화가로써 활동한 채용신이 있었다. 그는 고종의 어진부터 전우와 같은 대유학자, 황현과 같은 우국지사, 뭇 조선의 여인들까지 근대 인물들의 면면을 그려왔는데, 그를 대표하는 작품이 이 면암 최익현 초상(보물 제1510호)이다. 면암 최익현은 당시 단발령에 맞서, “목을 자를지언정 머리칼은 자를 수 없다”라는 말은 남긴 인물로서, 74세의 나이에 항일의병운동을 일으켜 독립·민족운동의 초석을 이룬 독립운동계의 큰 어른이기도 하다. 이 초상은 74세의 면암이 심의를 입고서 사냥꾼들이 겨울철에 착용하는 가죽감태를 쓰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당시로써는 매우 파격적인 것이었다. 표암의 자화상에서와 같이 의관을 서로 맞지 않게 그려낸 것은, 그가 유학자로서 정삼품에 오른 사대부이자 항일운동과 의병봉기를 이끈 우국지사인 것을 표현한 것이다. 또한 조선 초중기의 초상과는 달리 서양화법이 제법 엿보는데, 밀려들어 오기 시작한 서양의 기법과 전통적인 우리네 회화의 기법을 적절히 융합하여 그려낸, 조선시대 초상화의 맥이 이어진 마지막 초상 중 하나이다.

 

葦滄 오세창 肖像 · 개인소장

필자는 끝으로 존경해 마지않는 한 어른의 초상을 소개하며 글을 마무리 짓고자 한다. 위창 오세창 선생은 우리나라의 서화사를 집대성하고, 민족대표 삼십삼인 중 일인으로 활약하며 독립운동을 이끌었으며, 우리나라 언론계의 초석을 다지기도 하셨다. 선생의 위업을 빼놓고는 한국의 미술사와 독립운동사를 논할 수 없다. 근대의 인물인 만큼 사진 또한 여럿 남아 있으나, 개인소장으로 전해지는 초상이 한 점이 있다. 종이에 수묵으로 그려진 이 초상은 마치 당시 찍어진 사진인 듯 전통적인 초상화의 기법은 다소 찾아보기 어렵다. 그려진 기법은 서양화에 가깝고, 흑백의 빛만으로 화면을 구성했으나 그 정신과 형체를 함께 담아내는 전통은 온전히 보전되었으니, 필자는 이 초상을 실지로 마주하고서 선생의 독립에 대한 의지와 예술에 대한 식견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우리네 어른들의 면모가 이와 같았다. 가슴 벅차지 아니한가. 이처럼 웅혼한 정신과 예술적 역량으로 그려진 조선의 초상은 수백수천여 점에 달한다. 초상 하나하나가 곧 그 인물이오 그 어른이니, 우리는 전해진 초상을 통하여 수백수천여 명의 어른들을 실로 뵙는 듯하다. 정밀하고 세밀하게 그 인물의 형체를 있는 그대로 그려냄을 넘어서 그가 살아온 생애와 정신을 오롯이 담아내고자 했으니, 조선의 초상화는 역사적, 예술적, 의학적 사료이자 하나하나의 얼이오 넋이다.

그려진 정신인 조선의 초상은 아름다운 우리네 문화재임을 넘어서 인류가 보전해야 할 문화유산으로, 마땅히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써 등재되어야 할 것이다. 필자의 개인적 바람으로 이와 같은 조선의 초상을 런던의 국립초상화박물관, 빠리의 루브르박물관 그리고 빈 미술사박물관 등에서 루벤스와 렘브란트 등 뭇 서양화가들의 걸작들과 마주하여 비교하며 완상, 알현하고, 그 아름다움을 널리 전하고 싶다.

 

글 三樂(삼락) 박민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