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 큰 인물 –

durch Leiden zur Freude, Ludwig van Beethoven

 

 

인간에게 있어서 위대함이란 무엇인가. 진리란 무엇인가. 또, 음악이란 무엇인가.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위해 쓰여진 듯한 베토벤의 삶과 작품들은 오늘에도 여전히 울려 퍼지고 있다. 베토벤, 그 이름과 그의 음악만큼 필자의 심장을 요동치게 하는 작곡가는 없다. Ludwig van Beethoven! 귀먹은 음악가, 고전과 낭만을 넘나드는 작곡계의 거봉, 樂聖. 수많은 수식어로 표상되는 베토벤은 생의 대부분을 여기 빈에서 머물었고, 마지막 숨 또한 이곳에서 거두었다. 그렇기에 빈의 도처에서 그의 숨결과 발자취를 느낄 수 있다. 그런 베토벤을 필자는 구라파의 여느 인물보다 가장 존경함에 그 흠모하는 마음으로써 탄생부터 삶을 마감하기까지, 음악을 통하여 세상에 외친 뜻에 대해, 그의 생애와 그 작품세계에 대하여 논하고자 한다.

 

한 위대한 인간의 첫 울림, 1770년 12월의 Bonn

250년 전, 본이라는 도시에서 훗날 악성이라 불리울 한 위대한 인간이 태어난다. 그는 플랑드르 지역에서 이주해 온 음악가 집안에서 나고 자랐는데, 본으로 거처를 옮긴 그의 조부는 본의 궁정악장까지 지낸 저명한 음악가였고, 외아들 이였던 베토벤의 부친 또한 성악가로 활동하며 궁정악장에 오른 인물이었다. 베토벤의 아버지 요한과 모친 마리아는 1767년 혼인하여 슬하에 일곱 자녀를 낳았으나 첫째는 낳은 지 며칠 만에 잃었고, 1770년 겨울 베토벤을 맏이로 얻었다. 12월 17일에 세례를 받았다는 기록만이 전해져 정확한 탄생일을 알 수 없으나, 대개 태어난 다음 날에 세례를 받는 관례로 16일이 그 날일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베토벤 아래로 태어난 동생 카스파와 요한만이 성년기를 넘겼고, 그 아래로 태어난 아이들은 모두 유아기에 삶을 마쳤다.

베토벤은 어머니의 자애로움과 아들을 모차르트처럼 키우려는 아버지의 욕망 아래 자랐다. 그를 신동으로 만들고자 어릴 적부터 부친을 포함한 여러 은사들에게 작곡과 피아노, 바이올린, 오르간 등 다양한 악기를 배우고 익혀 나가게 했다. 1783년 첫 작곡을 시작으로, 이듬해엔 궁정 예배당의 오르가니스트로 일하게 되었고 하프시코드와 비올라를 또한 연주하기도 했다. 89년에는 궁정교향악단의 부지휘자에까지 오르게 되는데, 여러 작품들을 접하며 예술세계를 점차 넓혀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수줍은 많은 소년은 그렇게 음악에 대한 꿈을 키워 나갔다.

1787년 본 대주교의 후원으로 빈에 방문할 수 있었으나, 이 빈으로의 첫 번째 여정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 그리고 그해 베토벤은 어머니를 여읜다. 1789년에는 술독에 빠진 아버지를 대신해 가장 역할을 해 나가기 시작했고, 90년엔 본에 잠시 들린 하이든을 만나 인연을 맺었다 전해진다. 1792년 겨울, 베토벤은 선제후의 후원으로 음악가로서의 성공을 꿈꾸며 빈으로 떠났고, 빈에 도착한 직후 아버지의 부고를 전해 들었다.

 

 

귓병 앓는 작곡가, 청력 잃은 음악가

빈에 당도한 그는 하이든과 안토니오 살리에리를 비롯한 저명한 음악가들과 사제의 연을 맺으며 배움의 기회를 넓혀 나갔고, 여러 귀족들과 연이 닿아 그의 이름을 알려 나갈 수 있었다. 그중엔 그의 큰 후원가가 된 라히노브스키 공작과 루돌프 대공이 있었으며 피아노 소나타 ‘비창’과 피아노 삼중주 ‘대공’, 피아노 협주곡 ‘황제’, 장엄 미사 등을 그들에 헌정했다. 젊은 날의 베토벤은 후원 외로도 연주와 교습으로 생계를 이어 나갔고, 작곡 활동을 펼침에 빈의 Burg Theater와 Theaters an der Wien 등에서 그의 작품들을 올리기도 하였다. 그렇게 그는 음악의 수도 빈에서 차차 베토벤이란 명성을 떨쳐 성공의 가도로 달려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호기에도 불구하고 베토벤은 청력이란 것을 잃어가는 일생일대의 고난을 앓게 된다. 작곡가에게 음악가에게 청각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듣지 못하고 음악이란 것을 창조해 낼 수 있는가. 가장 왕성한 활동을 벌여 갈 시기에, 음악가로서의 성공을 눈앞에 둔 시절에 그는 귀머거리가 된다는 운명 앞에 놓이게 된다. 그 고뇌가 하일리겐슈타트에서 써 남긴 유서에 잘 드러나 있다. 베토벤의 아우들에 쓴 이 유서에 자신의 삶을 끝내고 난 뒤의 일을 논하고 작별을 고하기까지 했다. 그의 나이 불과 33세의 일이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서 가장 남다른 것은 음악가로서 청력을 잃었다는 사실 아닐까. 그가 귓병을 앓음으로, 청력을 잃음으로, 들리지 않는다는 고뇌를 통하여 베토벤다운 베토벤만의 작품들을 써 나갈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Wiener Konzerthaus와 빈 시립공원 사이의 베토벤像 – 1880년 그의 탄생 110주년을 기념하여 제작되었다.

 

 

EROICA, 세상의 모든 영웅에게

베토벤 스스로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에서 밝힌 바와 같이, 삶을 송두리째 흔드는 고뇌를 끊어낼 수 있게 하는 것은 예술이었다. 오직 예술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영웅을 마주한다.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이념과 나폴레옹 그리고 비로소 고뇌를 넘어 환희로 나아가는 베토벤 자신이다. 이 시기에 작곡한 작품으로써 베토벤의 중년기작을 대표하며, 무엇보다 9번 교향곡이 나오기 이전의 교향곡 중 그 스스로 가장 아꼈다고 전해지는 작품이 바로 작품번호 55번, 제 3번 교향곡 ‘Eroica;영웅’이다. 곡은 통상의 교향곡과 같이 네 악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첫 악장의 도입부부터 곡의 형식과 규모, 길이 등 모두가 파격적이었다. 때문에 초연 당시의 일부 대중은 이를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러나 곧 출판과 더불어 하이든과 모차르트를 능가했다 평가 받았고, 베를리오즈와 바그너 등 수많은 작곡가들에 영향을 주었다. 이 작품으로써 베토벤은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고전적 양식을 넘어서고 고전과 낭만을 잇는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창조해 냈다. 베토벤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영웅적이며, 번뇌와 익살을 그리고 승리로 나아가는 인간상을 교향시적으로 담았으니, 우리는 이 곡으로써 마치 베토벤이란 인물을 실로 마주하는 듯하다.

3번 교향곡 in Es-Dur op. 55, »Eroica«의 필사본 © Gesellschaft der Musikfreunde in Wien

본래 나폴레옹에 헌정하려 했지만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는 소식에 표지에 쓴 Bonaparte를 지우고 Sinfonia Eroica라 고쳐 썼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빈 악우협회가 소장한 필사본 표지에서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관련 유적으로 빈 되블링에 위치한 에로이카하우스(Döblinger Hauptstraße 92)가 있으나 현재는 휴관 중에 있다. 필자는 특별히 이 곡에 대한 탁월한 해석으로써 1982년의 베를린 필 100주년 기념 공연 영상을 추천하고 싶다. 당초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을 연주할 예정이었으나 지휘자의 건강 문제로 3번 교향곡으로 긴급히 교체, 게네랄프로베만으로 어느 악단 어느 지휘자보다 영웅적으로 연주해 내어 청자에 희로애락을 넘어 가슴 웅대해지는 감동을 선사하며, 실황 영상이기에 인간미 또한 느낄 수 있다.

 

 

운명의 문에 그리고 자연에게

“운명은 문을 이와 같이 두드린다!” 베토벤의 교향곡 5번 C단조 1악장의 악상이라 전해지는 문장이다. 이 때문에 곡의 부제가 운명이라 잘못 불리고, 그 부제로 인해 이 곡이 염세적이며 절망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2악장의 고요 속의 고뇌를 거쳐 3악장의 고난에 투쟁, 이윽고 4악장의 운명에 대한 승리의 쟁취로써 이어지는 곡의 흐름으로 베토벤이 말하고자 했던 것은 직면한 운명에 굴하지 않고 당당히 나아가 승리의 팡파레를 울리라는 것이었다. 여느 작품 보다 베토벤의 인생관을 가장 잘 투영한 작품이며 공들여 창작한 곡인만큼 수도 없이 수정하고 보완했을 것이다. 그 덕에 우리는 탄탄한 짜임새로 높은 완성도를 자랑하는 이 곡으로써 삶에 대한 의지를 굳게 다짐할 수 있는 것이다.

5번 교향곡 in c­-Moll op. 67 필사본 © Prag, The Lobkowicz Collections

 

Julius Schmid寫 © Wien Museum

베토벤에게 있어 이러한 예술 외로 삶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이 있으니 바로 자연이었다. 앞선 작품에서 표현된 고뇌에 대해, 산과 들에서 고요히 흐르는 시내와 아름다이 우는 새들에 위안을 받은 것이다. 그는 이따금 빈의 숲을 거닐며 산책을 즐겼는데, 그곳에서 작품에 대한 영감과 인생에 대한 위로를 얻었다. 그런 자연에 대한 감사함을 음악으로써 드러낸 것이 교향곡 6번 F장조 ‘전원;Patoral’이다. 전곡과 대비되면서도 엇비슷한데, 다섯 악장으로 구성되었으며 각 악장에 스스로 표제를 달아, 1악장에 ‘전원에 닿았을 적 이는 쾌활한 정감’, 2악장에 ‘냇가에서의 풍경’, 3악장에 ‘촌락의 유쾌한 생활상’, 4악장에 ‘폭풍의 악천후’ 그리고 5악장에 ‘목가(牧歌) – 폭풍이 지나 기쁘고 감사에 가득 찬 감회’로써 자연과 더부는 전원의 풍경을 그려냈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자연을 교향시적으로 여감 없이 써 내어 듣는 이로 하여금 평안한 감정을 안겨 준다. 그의 인생과 작품을 논함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곡이라.

 

 

또 다른 고뇌의 객체, 불멸의 연인

그가 앓던 귓병 외로도 베토벤을 고뇌하게 하는 대상이 있었으니 불멸의 연인, 사랑이었다. 평생 독신으로 배우자를 두진 않았으나 그에게는 혼인을 약속했던 한 여인을 비롯하여 여러 연인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소싯적의 만남을 제외하면 대부분 30대 초반에서 40대 초반 사이의 기간에 맺어진 인연이었다. 40대 중반 이후엔 조카 칼에 모든 정성을 다했기에 별다른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이러한 베토벤의 연애사는 그의 작품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그런 작품의 상당수가 연인들에 헌정되었다.

그 중 베토벤의 사후 그의 비밀서랍에서 발견된, 불멸의 연인에 부치는 편지는 오늘날까지도 회자되며 음악사적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 서랍 속에 간직하며 편지한 대상에게 발송하지 않은 이 편지는 “나의 천사, 나의 전부이며, 나의 분신인 그대여 …”로 운을 띄는데, 그 불멸의 연인이 누구인지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이외로도 연인들과 나눈 여러 서신이 있지만, 이 몇 장의 편지에서 베토벤이 지닌 사랑에 대한 감정이 얼마나 순수하며 또 그 사랑에 대해 얼마나 깊이 고뇌했는지 느낄 수 있다. 베토벤에게 기쁨을 주기도 혹은 시련을 주기도 한 그의 연인들은 또 다른 영감으로써 그의 작품 속에 은연히 스며들어 있다.

 

 

유일한 오페라, 여성의 혁명극, 피델리오

베토벤의 유일한 오페라 작품인 피델리오는 일찍이 1804년 작곡을 시작하여 이듬해 완성되고 초연되었으나 정치적 배경과 흥행의 문제로 수차례 수정되었는데 1814년 마지막 개작을 끝으로 완성된다. 10여 년에 걸쳐 고쳐지고 명칭까지 바뀐 이 오페라의 서곡은 네 곡에 이른다. 극의 내용은 프랑스 대혁명 당시 억울히 옥에 갇힌 남편을 구하고자 한 부인이 남장을 하여 구출해 낸 실화를 바탕으로 각색된 이야기이다. 마지막 개작으로 정해진 피델리오라는 이름이 바로 남자로 분장한 여주인공 레오노레를 칭하는 것이며, 하나뿐인 오페라임에도 모차르트의 오페라들과 함께 독일어 오페라 중 비중 있는 작품으로 꼽히며, 후배인 베버와 바그너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피델리오는 오페라라는 장르임에도 베토벤만의 성품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 그는 평소 세속적인 희극에 대해 비판을 해왔고 또한 오페라에 쓰일 적절한 각본을 찾지 못하였다. 그러다 이내 프랑스의 대혁명과 함께 당시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Leonore, ou l’amour conjugal; 레오노르, 부부의 사랑>을 마주한다. 극이 다루는 주제는 자유를 쟁취하는 투쟁, 혁명극, 그것도 여성에 의한 것이었다. 또한 베토벤은 평소 흠모한 괴테가 줄곧 주창했던 여성성에 의한 구원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며, <파우스트>의 마지막 문장 „Das Ewig-Weibliche zieht uns hinan; 영원하며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이끈다.“는 괴테의 양극성에 대한 통찰과도 그 관념이 일맥상통한다. 이와 같은 연유에서 당시로써도 파격적인, 여성이 주체가 되어 극을 이끄는 각본을 택했을 것이다. 나아가 베토벤은 여성에 의한 구원을 통해 프랑스 대혁명으로 주창된 자유·평등·박애라는 위대한 이념을 오페라로써 외치고자 했던 것이다. 한편으로 베토벤은 말년에 괴테의 <파우스트>를 오페라로 창작할 것을 구상했으나 끝내 이루지 못하였다.

 

 

장쾌, 유려 그리고 위풍, 황제의 품격

베토벤의 작품세계를 논함에 있어 그의 협주곡들을 또한 빼놓을 수 없다. 그가 남긴 협주곡에는 바이올린 협주곡을 비롯하여 삼중 협주곡, 합창 환상곡 그리고 다섯 곡의 피아노 협주곡 등이 있다. 그 중 그의 다섯 번째 피아노 협주곡은 ‘황제’라는 별칭으로 불리는데, 역설적으로 그가 이 곡을 출판하기까지의 기간에 빈은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에 의해 점거당하고 오스트리아의 황제와 여러 귀족들은 빈을 떠난 시기였다. 당시 베토벤은 쏟아지는 포탄과 전쟁의 변란에서부터 그마저 희미해져 가는 청력과 수입이 끊긴 생계를 힘겨이 지켜 이어 나가야 했다. 그러한 역사적 사실에도 이 곡이 황제라 칭해지는 까닭은 무엇인가.

모차르트가 확립한 피아노 협주곡의 양식을 잇고도 베토벤은 다채로운 시도를 통하여 후대의 협주곡 양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 중 마지막 피아노 협주곡인 이 작품으로, 협주곡임에도 관현악을 더불어 앞세워 서로 어우러지게 하여 비로소 교향악적 협주곡의 효시를 창조해 내었고, 이는 슈만과 브람스에 또한 큰 영향을 미쳤다. 곡은 1악장의 장대한 규모로 영웅적 기개를 장쾌하게 펼쳐 나가며, 2악장과 3악장은 끊김 없이 이어 연주되는데, 유려하면서도 박진해 나가는 통일성과 대비성을 겸비했다. 아다지오의 온화하고 평화로이 흐르는 선율은 여느 협주곡들에 비해 아름답고, 이어지는 론도는 다시금 경쾌하고 위엄 있는 곡조로 쉴 새 없이 힘차게 이어 나아간다. 복잡한 관현악 기법도 없고 난해한 피아노 기교도 없으나 오히려 화려하고 위풍당당하면서도 부드럽고 우아하며 또한 장대하다. 능히 그의 협주곡을 대표하는 베토벤의 역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스스로 붙인 표제가 아님에도 오늘날 황제라 불리우는 것이리라.

 

 

1823년의 베토벤 초상 Ferdinand Georg Waldmüller寫 ©Kunsthistorisches Museum Wien

 

 

형제여, 그대의 길을 달리라!

베토벤은 마치 아홉 번째 교향곡이 그의 최후의 교향곡이 될 줄 알았던 것처럼 일생일대의 역작, 서양음악사의 기념비적 작품을 완성하기에 이른다. 일찍이 독일의 두 대문호, 괴테와 쉴러를 평소 흠모하고 존숭하던 젊은 날의 베토벤은 쉴러의 시 <환희의 송가>를 접하였고 이를 음악으로써 써낼 것을 다짐한다. 그리고 1824년, 30여 년의 세월을 거쳐 정제된 사상과 음악적 역량을 힘껏 발휘하여 이를 완성했다. 역대 교향곡 중 최대의 규모로 편성한 이 우람한 교향곡에 이어서 브루크너와 말러는 우주를 교향악적으로 노래할 수 있었고, 4부 독창과 합창을 교향악에 어우름에 바그너는 이를 ‘문학과 음악의 융합’이라 평하고, 미래의 예술에 대한 인류의 성서라고까지 칭송했다. 이와 같이 예찬되는 이 한 곡의 음악으로 베토벤이 세계에 외친 뜻은 무엇인가.

독일 Weimar의 괴테-쉴러像

베토벤이 그의 마지막 교향곡에서 노래한 것은, 우주의 이치와 흐름이라 하기도 하고 인간의 삶을 투영한 것이라 하기도 한다. 허나 그의 어느 곡들보다 그의 생애를 고스란히 담아낸 작품이 바로 이 한 곡의 음악이 아닌가 필자는 생각한다. 마치 그의 삶과 사상을 온 힘을 다해 이 한 곡에 함축한 듯하다. 1악장은 흡사 우주가 태동하듯 거인이 몸부림치듯 신비롭고도 숭고하며, 2악장의 스케르초는 생명이 약동하듯 명랑하면서도 거칠다. 베토벤의 익살이 이와 같을까. 3악장의 아다지오는 그가 평생, 괴팍했던 성정의 그 저변에 숨겨놓은, 평화에 대한 갈망을 세상 사람들에 한없이 끌어내어 토로하듯 지극히 아름답다. 여느 교향곡의 아다지오 보다, 아름답다는 표현이 가장 걸맞는 악장이 아닐까. 4악장은 괴성을 울리며 각 악장의 멜로디가 이따금 반복되고 뒤이어 환희의 선율이 흐른다. 그러나 다시금 괴성이 반복되며 우렁찬 저음으로, “오, 벗들이여. 이 소리가 아니니라! 더욱 즐거우며 환희에 찬 선율을 노래하자!”라 외친다. 뒤이어 쉴러와 베토벤이 품었던 웅대한 이상을 4부의 독창과 합창의 아름다운 하모니로 노래하다, 이윽고 테너의 독창을 앞세워 영웅의 길로 나아갈 것을 외친다.

Froh, wie seine Sonnen fliegen, 
durch des Himmels prächt’gen Plan, 
Laufet, Brüder, eure Bahn, 
freudig, wie ein Held zum siegen. 
하늘의 태양이 환희에 차 
무한한 우주의 궤도를 나르듯. 
형제여, 그대의 길을 달리라, 
영웅이 승리의 길을 달리듯!

테너의 독창과 합창이 어우러 외친 뜻에 이어 기악이 역경을 헤치듯 달려 나아가, 마침내 환희를 맞이한다. 온 인류가 형제가 되는 환희를!

Freude, schöner Götterfunken, 
Tochter aus Elisium, 
Wir betreten feuertrunken, 
Himmlische, dein Heiligtum. 
Deine Zauber binden wieder, 
was die Mode streng geteilt, 
Alle Menschen werden Brüder, 
wo dein sanfter Flügel weilt. 
환희여, 신들의 아름다운 광채여, 
낙원의 여인이여, 
우리 모두 광휘에 취해 
하늘의 성전으로 들어선다. 
가혹한 현실이 갈라놓은 우리를 
그대의 힘으로 다시 결집시키니. 
모든 인간은 더불어 형제가 되노라 
그대의 온화한 나래가 머무르는 곳에서. 

 

분단된 조국에 놓여진 오늘의 우리에게 모든 인간이 형제가 되노라는 저 문장은 우리의 가슴을 고동치게 한다.

9번 교향곡 in d-Moll op. 125, 4악장의 필사본 부분 © Gesellschaft der Musikfreunde in Wien

베토벤의 요청으로 초연 당시 공연장의 관객들과 악단원은 무대 위 두 명의 지휘자를 마주해야 했는데, 이 곡을 필히 베토벤 그 스스로 지휘하겠다는 결연한 의지에 의한 뜻이었다. 때문에 부득이 부지휘자와 함께 올라 연주해야만 했고, 그렇게 두 사람의 지휘로 이끌어진 연주는 4악장의 그 광명정대한 피날레로 역사적인 연주를 끝마쳤다. 이에 청중은 우레와 같은 갈채를 보냈다. 그러나 베토벤은 이를 알 수 없었다. 그러자 콘트랄토 독창을 맡은 가수가 그를 이끌어 객석을 향하게 했고 이를 두 눈으로 목도한 베토벤은 이내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成於樂, ‘음악으로써 완성된다’라 공자는 논한 바 있다. 단 한 곡의 음악으로써 그 뜻이 여실히 드러난 작품으로, 서양 음악사에서 그에 대한 월계관을 씌울 작품은 바로 이 9번 교향곡이리라. 어느 미학자가 우리네 땅에서 석굴암만이 남겨진다 해도 이 땅의 민족이 위대한 미감을 지녔다 평가 받을 것이라 했듯, 필자는 서구의 어느 작품에 앞서 이 9번 교향곡만이 전해진다 해도 인류가 얼마나 위대한 음악세계와 예술세계를 향유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라 논하고 싶다.

 

1989년 독일은 동독과 서독을 가르는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며 이 곡을 연주하매 <환희의 송가>에서 쉴러가 본래 의도했던, Freude;환희를 Freiheit;자유로 바꾸어 부른 역사가 있다. 나아가 유네스코는 베토벤의 친필 악보를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였는데, 단일 작품 악보로는 최초의 등재였다. 아울러, EU의 전신인 유럽공동체에서 이 곡을 유럽찬가로써 지정하였고 오늘날까지 그를 유럽연합의 대표곡으로써 이어 부르고 있으며, CD;compact disc가 필립스와 소니의 공동연구로 개발되어 그 크기를 결정할 때, 지름의 길이를 이 곡으로 정했다는 일화 또한 전해진다. 이와 같이 이 한 곡의 작품이 음악세계를 넘어 오늘날의 인류에까지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한 사람이 베토벤시대 이후에 나 이 곡을 듣지 못하고 삶을 마치는 것은 베토벤이 청력을 잃은 만큼의 비극과 같다 생각한다. 베토벤 스스로 지휘대에 서 자신의 곡을 연주한 이후, 이 곡에 대한 해석과 연주 그리고 녹음과 영상은 수없이 많이 간행되어 왔다. 대표적으로, 푸르트벵글러의 지휘 아래 바이로이트와 루체른에서 녹음된 전설적인 음반, 올해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100주년을 기념하고 베토벤 탄생 250주년을 기념하는 빈필과 리카르도 무티의 연주 등이 있으나, 필자는 또한 1977년 12월 31일 필하모니 베를린에서의 Silvesterkonzert 실황 영상을 추천하고자 한다. 오스트리아가 낳은 또 다른 불세출의 음악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의 지휘로 베를린필과 당대를 대표하는 성악진, 합창단은 베토벤을 뫼시고서 연주하듯 전력을 다해 환희의 뜻을 노래한다. 감독의 영상미 또한 자못 훌륭하니, 카라얀이 남긴 영상 중의 백미이라. 1977년은 또한 베토벤 서거 150주년을 맞은 해이기도 했다.

 

 

Wien, 1827년 3월 26일. 악성의 마지막 순간

베토벤은 삶을 마치는 순간까지 음악에 전념했다. 장엄 미사와 9번 교향곡을 완성한 후 그의 또 다른 음악적 위업으로써 평가받는 여러 현악4중주를 작곡해 남겼고, 미완성으로 남은 10번 교향곡을 비롯하여 레퀴엠과 오페라 <파우스트>를 구상 중에 있었다. 오랜 세월 질병에 시달린 베토벤은 말년에도 투병을 이어 가야만 했다. 말년의 베토벤을 상봉한 로시니는 자신과 같이 보잘것없는 사람은 가슴에 훈장을 차는데, 베토벤과 같이 위대한 예술가가 궁핍한 처지에 놓여 있는 것에 대단히 가슴 아파했다 한다. 임종을 며칠 앞두고서 만난 슈베르트를 보고선 용기를 잃지 말 것을 당부했고, 병상의 노쇠한 선생을 마주한 슈베르트는 끝내 눈물을 훔치고 말았다고 한다. 그리고 1827년 3월 26일, 번개와 천둥이 요란히 치던 날 베토벤은 벗들과 친지, 제자들을 곁에 두고는 마지막 숨을 거두어 그 생을 마감했다.

베토벤이 말년의 여생을 보내고 영면한 고택의 표지석

29일, 빈의 Währinger Ortsfriedhof에서 그의 장례식이 거행되었고, 그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하고자 약 2만의 대중이 운집했다 전해진다. 1888년엔 대중의 그에 대한 존경심에 힘입어 중앙묘지로 옮겨 모셔졌고, 그렇게 베토벤은 오늘날 빈의 중앙묘지에 고요히 잠들어 있다.

빈 중앙묘지의 베토벤 묘소

 

 

악성, 음악세계에서의 성인이란 칭호는 그의 삶과 음악을 통해 세상에 외쳤던 뜻이 이와 같았기 때문이라. 베토벤을 모티브로 쓴 대하소설 <Jean Christophe>로 노벨 문학상을 탄 프랑스의 문호 로맹 롤랑은 그의 생을, ‘불행하고 가난하며 불구인데다 한없이 고독한 한 인간, 마치 고뇌의 화신과도 같았던, 인간세계로부터 기쁨을 거절당한 한 사람이 스스로 환희를 창조해 냈다.’고 평했다.

그의 탄생 250주년에 즈음하여, 필자를 여기 빈에 있게 한 한 사람의 생애와 예술세계를 돌이켜 보건대, 그의 삶과 그의 음악은 그를 넘어서 우리의 삶과 후대의 예술세계를 지탱하게끔 하니, 그가 거닐고 고뇌하던 빈의 곳곳에서 그의 자취를 따르다 보면 형언 할 수 없는 무언가에 이끌려 담대한 용기를 얻게 되고, 그가 남긴 음악에서 우리는 인류가 앞으로 나아갈 환희로 가득 찬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것이라.

루드비히 판 베토벤! ‘durch Leiden zur Freude; 고뇌를 넘어 환희로’라 표상되는 일생을 살아온 한 위대한 인간. 인류가 갈라지고 고뇌하는 오늘의 순간에, 베토벤이 세상에 외쳤던 그 뜻은 그의 삶과 음악을 통하여 여여히 울려 퍼지고 있다. Freude;환희와 Freiheit;자유, Frieden;평화를 위하여!

 

글 三樂(삼락) 박민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