앳되어 보이는 얼굴에 밝고 높은 목소리. 수줍은 듯 하지만 침착하고 분명한 자기 의견. 이것이 바로 작곡가 이서림 씨의 첫인상이었다. 이서림씨를 만나기 전, 인터뷰를 준비하는 내내 내 머릿속에는 아주 기초적인, 하지만 언제나 늘 궁금했던 하나의 질문이 있었다.

‘작곡을 하는 사람들은 과연 무슨 생각을 하며 살까?’

예술의 한 분야에서, 특히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낸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더구나 작곡가들은 그렇게 어려운 과정을 거쳐 만들어 낸 곡을 스스로 연주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연주자들)에게 먼저 이해시키고 그들을 통해 자신의 소리를 듣는다. 난제에 난제가 더해진 것이다. 그래서 내 머리에 언제나 들어있던 ‘왜 작곡을?’ 이란 질문이 그녀를 만나자 마자 터져 나왔다.

작곡가 이서림

음악을 시작하기까지

이서림씨는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어릴 적 부모님을 따라 서울로 이사 왔다가 초등학교부터는 인천에서 자랐다고 한다. 아버지가 목사님이신 까닭에 어렸을 적부터 교회에서 자랐고, 교회에서는 늘 반주자가 필요했기에 너무나 당연한 듯 6세부터 피아노를 배웠다고 한다.

“사실 초등학교 중학교 때 학교 합창단에 들어갔어요. 저는 노래가 하고 싶어서 지원을 한 거였는데, 일단 입단을 하고 나면 언제나 반주자로 지목이 되더라고요.”

학교에서도 교회에서도 늘 피아노는 서림씨의 몫이었다. 그러다가 음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것은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였다. 우연히 아이돌 기획사에서 연습생 제의가 들어왔던 것. 부모님은 이 제안에 찬성하지 않으셨고, 음악을 하고 싶은 거라면 제대로 음악 공부를 시작해 보라고 권유하셨다. 고1이 끝나갈 무렵, 서림씨는 본격적으로 작곡을 공부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언제나 피아노를 쳤었지만 저는 사실 한 곡을 계속해서 연습하기 보다 새로운 곡들을 보는 것을 좋아했어요. 한 곡을 거의 이해했다 싶으면 흥미를 잃고, 다른 곡을 찾았거든요. 그렇게 새로운 곡을 찾아보고 또 그 곡은 어떤 음악인가 파악해 보고 하는 것이 저에게는 더 재미가 있었어요. 그러면서 피아노보다는 작곡을 공부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죠”

비엔나 시청에서 연주된 이서림 작곡가의 Fanfare “Flug”

한국에서 비엔나로

단국대학교에서 작곡을 공부한 이서림씨는 같은 학교에서 함께 공부하던 선배 주현우씨와 2012년 결혼식을 올리고 오스트리아로 이주했다. 대학교 입시가 원하던 대로 되지 않았었지만, 이서림씨는 그러나 학교에서 남편 주현우씨를 만난 것을 이야기하며, 모든 일에 다 하나님의 뜻이 있었나 보다고 수줍게 웃었다. 둘은 특히 학부 시절 같은 오케스트라에서 각각 악보계와 매니저로 일하며 가까워 졌다고 한다.

“악보계는 말 그대로 오케스트라의 모든 악보를 담당하는 거예요. 오케스트라에 맞게 악보를 편곡하거나 혹은 각 악기에 맞게 파트보를 하나하나 다 준비하곤 하죠. 정말 얼마나 많은 악보를 그리고 또 그리고 했는지 몰라요. 그런데 지금 돌아보면 그때 악보계로 일했던 것이 오케스트라 각각의 악기 특성과 오케스트레이션(관현악법)을 공부할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던 것 같아요.”

오스트리아는 이서림씨에게 동경의 나라였다. 처음 아버지가 가르쳐 주신 영어 노래가 ‘에델바이스’ 였으며, 오스트리아를 배경으로 한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 은 이미 백번도 넘게 봤을 정도였다. 신혼여행을 간다면 잘츠부르크로 갈 거라며 줄 곧 노래를 했다고 한다. 그렇게 원하던 오스트리아였지만, 처음부터 이곳에 정착할 거라는 생각은 아니었다고.

“처음에는 ‘여기에 자리를 잡아야겠다’ 가 아니라, 이곳을 기점으로 다른 곳들도 더 살펴보자는 생각이었어요. 독일 쪽 도시들도 생각해 보면서 베를린이나 뮌헨 등 다른 도시들도 둘러봤었죠. 아무래도 혼자가 아니니까 남편의 일과 저의 학업, 우리 모두에게 어디가 가장 좋은 곳일까 생각했어야 했어요. 젊은 감각에 자유로운 분위기의 베를린도 좋았지만, 비엔나는 음악의 도시이고, 작지만 많은 문화예술이 함축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간단히 말해 ‘여기에 다 있다’ 하는 느낌이었죠. 어디를 둘러봐도 이만한 도시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이곳에 정착하기로 마음을 굳혔죠.”

ORF 라디오 홀에서 오케스트라 작품을 발표하는 이서림 작곡가

한국 음악? 유럽 음악? 나의 음악!

이서림씨는 곧 빈 시립음대에서 작곡 석사 과정을 시작했다. 비엔나에서의 작곡 공부는 한국에서와는 사뭇 다른 시간이었다고 그녀는 회상했다. “한국에서의 공부도 물론 제 음악적 토대를 쌓는데 도움이 되었지만, 비엔나에서는 좀 더 창의적으로 제 음악을 발전 시킬 수 있었어요“ 한국에서는 주로 아카데믹하고 정해진 형식, 제한된 편성의 곡을 써야 했다면, 이곳에서는 학부에서도 학생들에게 좀 더 실험적이고 자유로운 스타일, 악기편성으로 곡을 쓰도록 장려한다고 했다. 특히 비엔나에서의 재즈, 전자음악, 즉흥연주 수업들은 그녀의 작곡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했다.

“제 음악 스타일이 의외라고 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저는 영화도 잔잔한 드라마보다는 긴장감 넘치고 기승전결이 분명한 스릴러나 판타지, 재난 영화를 즐겨봐요. 곡도 마찬가지예요. 빠른 템포에 리드미컬하며 긴장과 이완이 강조되는 곡을 쓰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너는 곡을 남자처럼 쓴다’ 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이런 말들이 결국 ‘너는 이럴 것이다’ 는 선입견에서 오는 것이잖아요. 이곳에서는 종종 제게 동양적인 음악을 기대하기도 해요. 하지만 저를 볼 때 그런 것들을 빼고 그저 제 음악 그대로를 들어주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동양적인 요소를 사용해도 다른 것과 같이 그저 하나의 음악적 아이디어로 사용할 뿐이죠. 저는 비엔나에서 공부하면서 제가 무엇을 좋아하고 잘하는지를 더 알아가게 되었어요.”

장구를 주제로 한 타악기 앙상블 “놀이”의 초연 사진

그녀만의 색깔, 그녀만의 음악

들리는 소리에서, 책의 문구에서, 지나가는 거리에서.. 이 모든 것들이 이서림씨에게 영감을 주는 요소들이다. 이서림씨는 그런 것들을 메모하는 습관이 있다고 했다. 실제로 앉아서 악보를 그리는 것보다 다양한 음악적 아이디어들을 정리하는 것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고 한다. 그녀만의 독특한 생각과 색깔들은 그녀의 음악에 고스란히 담겨있고, 이런 그녀의 음악들은 이미 “빈모던페스티벌” 이나 “ORF Ö1 Zeit-Ton” 라디오 방송을 통해 소개되었다.

“2018년 빈모던페스티벌에서 선발되어 연주된 작품은 으로 일렉트릭 기타와 타악기 앙상블을 위한 곡이에요. 당시 빈모던 2018의 주제 Sicherheit와 소주제 Sicherheitslücken을 보고 제게 떠오른 단어는 ‘시간‘이었어요. 항상 기준이 되고 정확하다고 생각하는 시간에 틈을 주어 Sicherheitslücken을 나타내고 싶었죠. 고대 그리스에서는 두 가지 시간의 관념-Chronos와 Kairos-이 있어요. 객관적이고 일정한 시간인 Chronos 시간에 반해, Kairos 시간은 주관적이고 변화하는 시간을 나타내죠. 이 작품에서 일정한 시간은 불규칙한 박자, 갑작스러운 다이나믹, 즉흥연주와 같은 예상할 수 없는 음악적 요소들로 점차 변화되어 표현되고 있어요. 또한 그리스어 Kairos는 또한 특별한 기회를 의미하기도 해요. 이 곡에서는 빈모던의 주제 Sicherheitslücken 처럼, 안전을 버리고 택한 예상할 수 없는 음악적 시도들이 동시에 새로운 음악을 만드는 기회가 되기도 하는 것을 볼 수 있어요.”

“또한 ORF Radio Ö1에 소개되었던 곡 중 라는 곡이 있는데, 이 곡은 장구를 포함한 네 명의 타악기 주자를 위한 곡이에요. 한국의 사물놀이에서 구조적 아이디어를 얻어 민속 장단, 세마치, 자진모리, 휘모리를 변형하여 주요 리듬으로 사용하였죠. 부분적으로 나타나는 선율은 오음음계와 그와 상반되게 느껴지는 반음, 트라이톤을 합하여 구성하였고 또한 풍물놀이에서 개인놀음인 설장구에 자주 사용되는 가락을 기반으로 하여 서양의 카덴차와 같이 장구 솔로 부분을 포함시켰어요. 한국의 장구와 서양의 타악기들, 그리고 동서양의 음악 요소들이 조화롭게 결합하여 함께 역동적이며 신명나는 ‘놀이’판을 벌려보자는 의도였죠.”

그녀의 말대로 이서림씨는 안전하고 예상 가능 한 이야기들 보다는 좀 더 대담하고, 즉흥적이고 또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을 선호하는 듯했다. 그런 가운데 끊임없이 나만의 소리와 색깔들을 찾고자 하는 노력이 엿보였다.

와이너리에서 열린 색다른 연주회
동료 음악가들과 함께 연습실에서
와이너리에서 같이 연주한 동료 음악가들과 함께
베를린 필하모니 홀 대기실에서 동료 음악가들과 함께 – 좌로부터 연주를 기획한 주현우 아트바움 대표, 플루티스트 Albert Pae, 피아니스트 Andrew Pae, 작곡가 이서림

지금, 그리고 앞으로

학교를 졸업 후, 이서림씨는 두 가지 일을 병행하고 있다고 했다. 하나는 프리랜서 작곡가로서 계속 새로운 작품들을 써가는 것이다. 현재도 지난 그녀의 작품들을 보고 다른 작품 위촉을 받았으며, 내년 창단을 앞둔 비엔나 현대음악 단체의 작곡가로도 합류하게 되어 곡을 쓰는 중이라고 했다. 그녀는 큰 무대 위에서 올려지는 연주도 좋지만, 최근 청중들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소규모 연주의 매력에도 빠지게 되었다고 한다. 와이너리에서의 색다른 음악회부터 락 밴드 연주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장르는 더욱 다양해졌다.

또한 남편과 함께 Artbaum이라는 컨텐츠 제작 회사를 운영함으로써, 미디어 음악이나 광고 음악과 같은 음악 컨텐츠 제작 작업에도 함께하고 있다고 했다.

“어떤 한 방향에 저를 국한 시키고 싶지 않아요. 다양한 음악을 작곡하면서 좀 더 제 색깔을 가진 저만의 음악으로 발전시켜 나가고 싶은 마음이 있죠.”

마지막으로 비엔나에서 공부하는 친구들에게 주고 싶은 조언을 묻는 질문에 교류가 도움이 되는 것 같다고 했다.

“비엔나에는 뛰어난 음악가들이 주변에 많이 있잖아요. 함께 연주를 하다 보면 그들에게 배우는 것이 정말 많거든요. 비단 음악뿐만이 아니라 다른 분야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많은 경험과 생각들이 결국 음악에 반영되는 것이잖아요. 그래서 저부터 다양한 분야의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듣고 또 이곳의 문화적 풍요를 많이 누리려고 노력해요. 서로 많은 교류를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이서림 약력>
서울창작음악제 수상
대한민국 실내악작곡제전 수상
서울시향 진은숙 마스터클래스 선발
유네스코 아시아 아트컬쳐 워크샵 한국대표 작곡가 선발
오스트리아 ‘빈 모던 페스티벌’ 작품 연주
ORF RadioKulturhaus 오케스트라 작품 연주
Wiener Rathaus에서 작품 연주
ORF Ö1 Talentebörse-Kompositionspreises 2018 Finalistin 지명
ORF Radio Ö1에서 작품과 인터뷰 방송

글 윤설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