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군자, 선비의 향기 · 梅

– 우리네 아름다움 –

사군자, 선비의 향기 ·

 

 

봄, 찬란한 봄날이 오면 만물은 푸르고 또 푸르게 생장하는 아름다움과 생기를 한껏 발한다.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을 지나 다시 봄이 되돌아오는 자연의 흐름은, 그 품에서 인간이 우주를 이해하고 이치를 깨닫게 하는 큰 화두 중 하나이리라. 그러한 봄이 왔음을 알리는, 대표적 봄의 전령이 바로 매화이다. 소복이 쌓인 눈이 채 녹기도 전에 온갖 꽃들에 앞서 피어내는 그 힘찬 생명력, 고고히 풍기는 그 그윽한 향기와 더불어 알찬 열매 또한 약용과 식용으로 널리 쓰여 왔다. 옛 어른들은 그런 매화를 단순히 식물로만 보는 것이 아닌 기개와 절조를 지닌 품성을 보아 높은 덕을 두루 갖춘 군자(君子)에 빗대었다. 자연을 통해 보고 배우며 익히려 한 것이다. 하여 선비들은 매화와 같은 식물 중 넷을 꼽아 사군자(四君子)라 하는 관념을 만들어 내었다.

사군자 梅·蘭·菊·竹, 곧 겨울의 추위를 이겨내고 은연히 피어나는 매화, 메마른 땅에서 오롯이 향을 발하는 난, 서리치는 가을에 홀로 강직히 피어나는 국화 그리고 사시사철 꼿꼿이 그 푸르름을 잃지 않는 대나무를 각 계절에 어울러 봄에 매, 여름에 난, 가을에 국, 겨울에 대로써 사군자를 정립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중국에서는 매란국죽이라 않고 난죽국매라 하여 춘란, 하죽, 추국, 동매로 우리와는 다른 계절적 관념의 차이가 있으며 일본서는 난죽매국이라 부르기도 한다. 덧붙여 매화는 대나무, 소나무와 더불어 세한삼우(歲寒三友)로도 일컫는다.

‘우리네 아름다움’을 주제로, 사군자 중 梅를 첫 계제로 기고해 나가려 한다. 먼저 필자가 가장 아끼는 三峰 정도전 선생의 <매설헌도梅雪軒圖>란 제목의 한시가 매화의 그 아름다운 의의를 잘 드러낸다.

고향산 아득허이 예장의 음기는 깊어졌고   故山渺渺豫章陰
대지에 이는 바람 차고 눈은 소복히 쌓였노나   大地風寒雪正深
창가에 고이 앉아 주역을 읽노라니   燕坐軒窓讀周易
가지 끝 흰 것 하나 하늘의 이치 보여내누나   枝頭一白見天心

가지 끝 흰 것 하나’란 곧, 막 피어나는 흰 매화꽃 한 봉오리를 뜻한다. 첫 구와 둘째 구는, 산이 아득히 보일만큼 날이 흐리며 바람 또한 차고 눈은 깊이 쌓여있는, 다시 말해 계절은 아직 한창 추운 한겨울임을 말한다. 셋째 구에서 장면을 전환하여, 그 세찬 겨울 집 창가에 의관을 정제하고 고이 앉아 우주의 이치를 논한 경전인 주역을 읽는 와중, 창밖의 저 매화나무 가지에서 추위를 이겨내고 막 피어나는 하얀 꽃봉오리가 보인다. 삼봉은 그 흰 매화 봉오리 하나에서 되레 天心(천심; 하늘의 마음), 우주의 이치를 읽어낸 것이다. 흰 것 하나가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봄이 돌아왔음을, 자연은 끝없이 생동하여 역경과 고난에 굴하지 않고 각기 제 몫을 해내는 위대한 자연의 섭리와 우주의 흐름을 몸소 보여내는 것이다. 어느 장대한 경전보다 자연 그 자체가 위대함을, 자연 그 자체에서 보고 깨우쳐 몸소 수신(修身)할 것을 읊는다. 이것이 바로 우리 어른들이 자연을 통하여 우주를 바라본 시각이며 안목이오, 풍류이자 학문을 닦는 마음가짐이다.

 

주돈이로부터 주희에 이르는 송대의 유림에 의해 성리학이 태동하여, 기존의 유학에서 우주를 이해하는 관점이 넓어지고 사물의 원리를 궁구하는 논리성은 깊어짐에, 그 영향으로 사물에 뜻을 투영시켜 시를 읊는 영물시(詠物詩)가 발달한다. 그에 따라 뜻을 회화적으로 표현한 문인화(文人畵)가 또한 발달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사군자라는 화제를 단순히 그 생김새 그대로 따라 그려내는 것이 아닌, 그것이 뜻하는 정신을 그려내기 시작한다. 인간을 자연에 견주어 이상적 인간상의 기품과 올곧음을, 외형의 단순한 묘사가 아닌 문기(文氣)와 사의(寫意)에 중점 두어 그린 것이다. 그렇기에 동시대 다채로운 서양화와 비교하며, 흰 것은 바탕이고 검은 것은 그림이라는 정도로의 일률적 인식은 옳지 못하다. 회화의 일차원적 완성도가 아닌 그 그림이 뜻하는 의의, 사의를 읽을 수 있어야하는 것이다.

 

묵매(墨梅), 매화 그림 자체로써 조선시대에 가장 이름을 떨친 화가로는 16세기의 雪谷 어몽룡(1566~1617)과 19세기의 又峰 조희룡(1789~1866)이 있다. 어몽룡은 조선의 고유한 묵매 양식을 확립하여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포도에 황집중, 묵죽에 이정과 더불어 당대의 삼절(三絶; 뛰어난 세 존재)로서 일컬어졌다. 대륙에서 또한 그 격을 높이 평가받은 어몽룡의 매화도 중에서도 <월매도>라는 작품은 조선시대 최고의 묵매라 평가되는데, 오늘날 한국은행의 오만원권 뒷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월매> 어몽룡 · 국립중앙박물관 ······························ <백매> 김홍도 · 간송미술관

매화와 관련하여 조선이 자랑하는 화원 檀園 김홍도(1745~1806?)에 대한 흥미로운 일화가 조희룡의 글로 전한다. 단원은 정조 임금의 총애를 받았으나 정조 사후 그는 끼니를 걸러야 할 정도의 처지에 놓여 있었다. 한날 어느 이가 매화 화분을 파는데 그 기이함에 자못 마음이 이끌렸으나 당장 수중엔 금전 한 푼이 없었다. 그러다 마침 그림 사례로 3천 냥이 들어오자 곧장 2천 냥으로 매화를 구입하고 8백 냥으론 술 몇 말을 사서는 벗들을 모아 곡차와 함께 매화향을 음미한다는 ‘매화음(梅花飮)’을 즐겼다. 나머지 2백 냥으로는 집에 쌀과 땔감을 들였으나 하루치 남짓 되었다 한다. 과연 조선의 화선(畫仙)다운 에피소드다.

 

어몽룡의 <월매도>와 함께 오만원권 지폐에 새겨져 있는, 조선 묵죽화 중 제일가는 걸작 <풍죽>을 그린 灘隱 이정(1554~1626)은 세종대왕의 고손으로 왕실의 자손이자 조선 제일의 묵죽화가로서 명성이 드높다. 대나무 그림 뿐 아니라 매화와 난화 또한 못지않게 빼어난데, 임란 직후 그렸다 전해지는 《삼청첩》이 그를 입증한다. 왜란 중에 그는 왜병에게 팔과 다리에 칼을 맞아 절체절명의 고난을 겪었으나 심기일전을 다하여 필생의 역작을 남겨 후세에 전한다. 바로 《삼청첩三淸帖》이다. ‘삼청첩’이란 표제에서 드러나듯 ‘청아한 세 군자’, 곧 대나무와 난 그리고 매화 그림 스무 폭 그리고 자작시 스물한 수를 한데 엮은 시화첩(詩畵帖)이 그것이다. 더불어 당대의 문장가 최립의 글과 당대의 명필 한호의 글씨가 더해져 품격을 높이고 후대에 송시열 등이 발문을 덧붙였다.

보물 제1984호 《三淸帖》 中 古梅 : 고매 – 灘隱 이정(李霆) · 흑견금니 · 간송미술관 ©간송미술문화재단 [간송미술문화재단 제공 – 무단전재 및 DB금지]
이정은 그림과 시를 먹물들인 비단에 금니(金泥; 아교풀에 개어 만든 금박 가루)로 쓰고 그렸는데, 그 중 달밤의 매화를 그린 이 <월매月梅>는 400여 년의 세월에도 여전히 광휘롭다. 무엇보다 깊은 밤에 매화 가지를 영롱히 비추는 저 보름달을 흩뿌리듯 금니를 찍어 그려냈고, 나무줄기와 시원히 뻗은 가지, 간결한 꽃봉오리와 구도까지 모두 조화롭게 필력을 여실히 발휘했다. 당시에도 일세지보(一世之寶)로 불린 이 기념비적 작품에 대하여 簡易 최립은 첩 서문에 시로써, “덕에 남은 일생 동안 나의 눈이 흐려지지 않으리라”고 평하였으며 간송미술관의 백인산 연구실장은 《삼청첩》을 조선 중기 문예의 정수로 꼽았다. 필자 또한 생에 처음 두 눈으로 이 《삼청첩》을 완상할 적의 심장 요동치는 감격을 잊을 수 없다.

보물 제1984호 《三淸帖》 中 月梅 : 달과 매화 – 灘隱 이정(李霆) · 흑견금니 · 간송미술관

 

이처럼 매화를 여러 문인들이 아껴 가까이 했음이 현재에도 그림과 글로써 전한다. 매화를 논하는 글에서 퇴계 이황을 빼놓고선 끝맺을 수 없다. 선생의 마지막 유언이 “저 매 화분에 물을 주라”라 알려졌을 만큼 선생은 평생 매화를 아끼고 가까이 두셨다. 실지로 선생은 거하는 곳에 매화나무를 심고 곁에서 가꾸며 생애에 걸쳐 예찬했다. 매화를 주제로 지은 한시를 모아 손수 시첩으로 묶어 두었으며, 문집에 전하는 그 수는 백여 편에 이른다. 선생이 거하던 도산서당과 선생을 모신 도산서원에는 봄이 되면 여여히 매화가 향을 발하며 그 절개를 드러낸다. 끝으로 고결한 그 매향이 널리 이르기를 바라며 퇴계선생의 시 한 수를 읊는다.

늦게 피어나는 매화의 그 참됨을 새삼 알겠노니   晩發梅兄更識眞
이 몸이 추운때를 겁내는지 아는듯하이   故應知我怯寒辰
가련하도다 이 밤에 내 병을 낫게만 한다면야   可憐此夜宜蘇病
능히 이 밤 다하도록 달과 함께 그대 마주하련만   能作終宵對月人

<陶山月夜詠梅: 도산의 달밤에 매화를 읊다> 中 한 首

 

글 三樂(삼락) 박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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