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 헝가리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국기

역사적 배경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은 1867년부터 1918년까지 존재하였던 국가이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기를 사용했던 이 제국은 역사적으로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유일한 이중제국이다. 오스트리아제국은 1806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프란츠 2세가 나폴레옹에 대항하여 오스트리아 대공국을 중심으로 자신의 영지와 바깥의 영지들을 전부 합하여 오스트리아제국으로 승격시키면서 세워졌다. 하지만 1809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패한 오스트리아제국은 프란츠 1세의 딸인 마리 루이츠를 나폴레옹과 결혼시키게 된다. 1813년 오스트리아제국은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프랑스에 승리하며 독일 지역에서 프랑스를 내어쫓고, 이후 다른 국가들과 동맹을 맺어 프랑스를 공격, 워털루 전투에서 프랑스를 패배시키고 유럽의 강대국 자리를 다시 차지하게 된다. (자세한 내용은 2018 겨울회지 참고)

1789년 프랑스 민족주의와 독립주의 및 1848년 헝가리 혁명이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탄생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헝가리를 중심으로 소수 민족의 독립운동이 강하게 일어나기 시작한데다 1866년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의 패배 후, 이탈리아 롬바르디아 지방 또한 상실하게 되면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실은 사실상 제국을 통제하기 어려워졌다. 결국 1867년 오스트리아는 헝가리 분리주의자들과 협상을 맺게 된다. 헝가리 왕국의 건설을 허락하는 동시에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셉 1세가 헝가리 국왕을 겸하게 되면서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인 이중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이 탄생하게 된다. 헝가리 민족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이 제안을 두고 논쟁이 일어나지만, 헝가리 민족주의자의 대표 중 하나였던 데크 페렌츠는 내부적으로는 완전한 자치를 누리되, 외교 및 재정/군사 부분은 오스트리아와 공동으로 처리하자는 뜻을 낸다. 여기에는 더 재정적으로 부유한 오스트리아와 동행하는 것이 헝가리에 이득이라는 경제적 계산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헝가리인들의 정치적 지위가 상승함에 따라 헝가리 영역에 거주하는 다른 슬라브 계열 민족들을 견제할 수 있다는 정치적 계산 역시 존재했다. 이렇게 양 민족의 입장이 잘 맞아 떨어졌고, 협상은 큰 문제 없이 진행된다. 그리하여 1867년 5월 29일, 독자적인 헝가리 의회가 황제에게 인준을 받고 정식으로 헝가리 왕령 내의 입법, 사법권을 넘겨 받으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이 탄생하게 된다.

이 결과 헝가리 주민들과 주도 세력이었던 귀족층은 주권 국가의 권리를 누리면서도 기존 합스부르크 왕가라는 보다 큰 정치적 연합체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것에 대해 만족해했으며, 이후 안정적인 번영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이 시절 헝가리는 지금의 헝가리가 아니라 다른 여러 슬라브계 소수 민족의 영토에 까지 걸쳐 이루어져 있었다. 번영의 길도 잠시, 헝가리 내부의 슬로바키아, 트란실바니아, 크로아티아를 중심으로 소수 민족의 불만이 커지기 시작하자 헝가리는 이러한 소수 민족의 불만에 단호한 강경책으로 대응한다.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에서 살고 있던 소수 민족들은 19세기 독립 국가를 목표로 하는 민족 운동을 전개하면서도, 사회나 정치적인 부분에서의 득이 컸기에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해체를 강력히 주장하지는 않았다.

이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실질적인 외교권이 없었던 헝가리왕국은 오스트리아를 따라 참전하게 된다. 그리고 1918년 10월 31일, 제국의 항복과 더불어 이 대타협도 무효가 되고만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종전과 함께 일부 영토는 이탈리아를 비롯한 여러 국가들에 돌아가고, 독립 국가들이 생겨났으며 오스트리아는 가장 많은 영토를 잃게 된다.

1867년에 탄생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인구는 3천 5백만 명으로 러시아와 독일 다음으로 세 번째로 인구가 많았으며, 면적은 프랑스와 독일보다도 넓었다. 경제적으로는 서유럽의 발달한 산업과 동유럽의 농업국 사이였다. 또한, 독일, 헝가리, 체코, 폴란드, 우크라이나, 루마니아, 크로아티아, 슬로바키아, 세르비아, 슬로베니아, 이탈리아 등 11개 민족이 살았던 다민족 국가였다. 독일어권에서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을 k.u.k라는 약칭으로 부른다. 이는 오스트리아의 황제이자 헝가리의 왕이라는 뜻의 kaiserlich und königlich의 줄임말이다.

행정구역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행정 구역은 오스트리아 제국 관할 지역과 헝가리 왕국 관할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후기에 점령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둘이 공동으로 관리하였다. 비공식적인 오스트리아령을 시스라이타니아(Cisleithanien 뜻: 라이타 강 동쪽)라고 부르는데 이는 그 영토 대부분이 라이타 강(Leitha)의 동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수립되기 이전까지 시스라이타니아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영토였으며 합스부르크 가의 지배를 받았다. 시스라이타니아와 마찬가지로 트란스라이타니아(Transleithanien 뜻: 라이타 강 서쪽), 즉 ‘헝가리령’ 부분에는 헝가리 외에도 딸린 영토들이 많았고 공식적으로는 ‘신성 헝가리의 성 이슈트반 왕관령’이라 불렸다. 여기서 성 이슈트반은 헝가리 왕국의 왕 성 이슈트반 대왕(Szent Istvan kiraly)을 가리킨다.

문화

오스트리아는 19세기까지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를 독점하며 오랜 세월 동안 독일어권 문화의 중심지였다. 하지만 비스마르크가 소독일 주의에 따라 오스트리아를 배제하고 통일 독일제국을 수립함에 따라 독일어권 문화의 중심지 자리를 독일 제국에게 내주게 된다. 또한,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이 완전히 해체되어 여러 나라로 분열됨에 따라 제국의 문화적 유산 역시 뿔뿔이 흩어져 각국의 독립된 문화로 분리되어 나갔다. 이러한 이유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문화는 다른 유럽 국가들과 비교시 상대적으로 축소 평가된다.

구스타프 말러 (1860-1911)

음악

유명한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구스타프 말러가 이 시기에 활동하였다. 구스타프 말러(1860 -1911)는 보헤미아 집안 유대인 가족 태생의 음악가이다. 1878년 빈 음악원을 졸업했고, 유럽 오페라하우스에서 지휘자로 일하다 이후 1897년에는 빈 국립 오페라 극장 감독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후반기에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와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감독을 역임했다. 작곡가로서 그는 19세기 음악과 20세기 초 음악의 다리 역할을 했다고 평가된다. 지휘자로서의 그의 위치는 확고했지만, 그의 음악은 나치 시대 동안 공연 금지를 당하며 오랜 기간이 지나서야 관심을 받았다. 이후 말러는 20세기의 작곡가 중 가장 자주 연주되고 녹음된 작곡가 중 한 명이 되었고, 그의 음악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구스타프 클림트 (1862-1918)

미술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 빈에서 태어난 오스트리아의 대표적인 상징주의 화가이며 빈 분리파 운동의 대표 회원 중 하나이다. 그는 에로틱하며 화려한 화풍으로 여성의 육체를 주제로 한 많은 작품을 남겼으나 때론 현실을 풍자하기도 하였다. 그는 1876년 빈 응용 미술학교에 입학하여 장식 회화를 공부했다. 이후 영국, 프랑스 등의 인상파 작품들을 접하며, 상대적으로 낙후된 오스트리아의 미술 경향과 미술 협회의 보수적인 태도에 반감을 느껴 1897년 빈 분리파를 결성하였다. 이후 예술의 자유를 외치며 반 아카데미 운동에 앞장섰다. 그의 유명한 작품으로는 키스, 아델르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 유디트 등이 있다.

글 이예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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