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네 큰 어른 –
秋史 · 阮堂, 두 아호로 쓰여진 김정희의 생애
“세상에 추사를 모르는 이 없지만, 아는 이도 없다.” ‘추사체’로 통하는 그 글씨는 반도를 넘어 당대 대륙과 열도에 이름을 떨쳤다. 허나 비단 선생의 그 붓글 이외로, 생애와 학문 그리고 예술세계에 대한 깊은 도량이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바가 많기에 저와 같은 말이 있는 것이리라.
선생은 고증학과 금석학의 대가이자 불가사상에 또한 도통하였고, 연암 박지원으로부터 창시되어 박제가 · 정약용을 잇는 實事求是 북학파의 거봉이었다. 연암의 법고창신法古創新 사상을 이어 입고출신入古出新으로 나아갔던 선생은 당대의 세계적 석학이자, 우리네 역사의 큰 인물이다. 추사와 완당으로 대표되는 선생의 아호로 쓰여진 그 생애에 대하여, 우리네 큰 어른, 김정희 선생에 대하여 논하고자 한다.
선생의 삶은 극과 극을 치달아 매우 다이나믹했다. 그러한 선생의 생은 충청도 예산 용궁리의 뼈대 깊은 명문가에서 시작된다. 조선왕조 오백년의 유일한 열녀가 있었으니 영조대왕의 차녀 화순옹주이다. 월성위에 봉해진 그녀의 부군 김한신이 선생의 증조부이니, 영조대왕이 선생의 먼 친척어른이 되는 것이다. 아울러, 선생의 고조부 김흥경은 영의정에 이른 인물이었으니, 이는 곧 선생이 왕족 다음가는 사대부 중의 사대부, 양반 중의 양반이었음을 말해 준다. 더불어, 어린 시절엔 북학파의 거두인 초정 박제가와 사제의 정을 나누게 되는데, 집안 내력을 바탕에 두고서 차후 청조의 석학들과 교류할 수 있는 발판이 되게 된다.
선생은 학문을 갈고닦음에 유학의 기본적 소량은 물론이오, 불가의 경전과 경학(經學), 사학(史學), 지리학과 천문학에까지 그 영역을 아울러 이르렀다. 그 중에서도 학자로서 일가를 이룬 분야라 평가 받는 고증학과 금석학은 당대의 석학으로서 그 학풍을 이끌기도 했다. 고증학은 실증적으로 경서를 연구함을, 금석학은 옛 비문으로 명문을 탐구함을 뜻한다. 금석학과 관련한 업적의 일례로, 무학대사비로 잘못 알려진 북한산 진흥왕순수비(국보 제3호)를 바로 잡은 것이 있으니 선생의 학문적 통찰이 어디에까지 닿았는지 알 수 있다.
금석문을 연구하고 고증학을 탐구함은 스승인 박제가의 영향도 있겠으나 당시 인연을 맺은 청나라 학자들의 영향이 적지 않다. 선생이 생원에 합격한 해인 24세 때, 부친 호조참판 김노경은 동지사(冬至使)의 부사(副使)로서 연경(베이징)에 가게 되는데, 자제군관(子弟軍官)의 신분으로 아버지를 따라 모시는 연행 길에 오르게 된다. 연경에 이르른 젊은 날의 김정희는 청나라 대석학 완원(阮元), 옹방강(翁方綱) 등과 만나는 호기를 누리게 되는데, 이 만남은 선생의 일생과 후학들의 인연에까지 큰 영향을 미친다. 이때 옹방강은 “經術文章 海東第一, 경학의 문장이 해동(海東; 우리나라를 일컫는 말)에서 제일이다”라 극찬했음이 전하고, 선생이 스스로 즐겨 쓴 아호 완당이 바로 완원의 완자를 따른 것이니 얼마나 그 영향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34세에 대과에 급제하여, 양반으로서 규장각과 암행어사를 거치고 성균관 대사성에 오르는 등 학문적 정치적 치적이 또한 자못 높다. 유학적 공적 외로도 불가사상에 있어서는, 당대의 큰스님이였던 백파율사와 선에 대한 논증을 서한으로 주고받으며 시시비비를 가릴 정도였으며, 우리나라 차문화를 집대성한 다성(茶聖) 초의선사와는 동갑내기 벗으로서 평생에 깊은 우애를 서로 나누었다. 말년엔 당시 도성 밖 한 사찰서 거하며 생을 마감한 사실 또한 전해지니 불가와의 인연이 자못 깊었음을 알 수 있다.
시詩·서書·화畵는 선비의 예술적 덕목으로, 선생은 또한 이에 두루 뛰어났다. 그림 중에선 난을 잘 치기로 유명한데, 흥선대원군으로 이름난 석파 이하응도 선생에게 난과 붓글을 배워 압록강 아래로는 석파의 난이 제일이라는 평을 받기도 했다. 선생의 난화 중에서도 만년의 대작인 이 <불이선란도>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불교적 이상을 품은 작품이다. 선생은 스무여 해만에 우연히 그려 두 번 다시없을 난화를 유마거사의 그 불이선不二禪에 빗대어 제시를 달았다. 유마거사의 불이선이란, 출가치 않은 석가모니의 제자 유마거사가 뭇 보살들과 진리를 논할 적 끝내 묵묵부답으로 응하자 이내 보살들이 진리는 말과 글로 형언할 수 없는 것임을 깨우친 일화에서 비롯된 불가의 사상이다. 불이선은 곧 대립을 떠난 경지, 진리가 하나임을 뜻한다. 불가사상에 대한 깊이와 불가와의 인연이 이러하기에 선생은 해동의 유마거사로 불리기도 했다.
병조참판을 지내던 55세에 선생은 동지부사로 임명되어 30년만의 연행의 기회를 얻는다. 그러나 연경으로의 세 번째 방문을 앞두고서 돌연 당쟁에 휘말려 끝내 귀양살이, 위리안치 형에 처해져 망망대해를 넘어 제주 최남단에 다다른다.
선생은 유배시절을 통해, 당시에나 이후로나 많은 걸작을 남겼다. 대표적인 것이 그 유명한 <세한도>(국보180호)이다. 제목은 바로 공자의 말씀 “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也”, ‘세찬 겨울이 지나서야 비로소 소나무와 잣나무의 그 푸르름을 안다’하는 데에서 비롯되었다. 이는 귀양살이하던 59세 때의 작품으로써, 당시 청(淸)에 역관으로 다니던 제자 이상적(李尙迪)을 위해 그린 것이다. 우선(藕船) 이상적이 권세를 따르는 세속인들과는 달리 문하의 옛 정을 잊지 아니하고 곤궁한 처지의 스승에게 성의를 다하는 데 감격함에, 그를 세한(歲寒; 세찬 추위에도 홀로 푸르른 소나무)에 비유하여 그려 낸 것이다. 후에 이상적은 이를 연경에 가져가 청의 문인들에게 선뵈는데 그 숭엄한 뜻에 격찬하며 지어 이어붙인 제찬이 10여 미터에 이른다.
제주유배시절, 당시 문예군주였던 헌종은 창덕궁의 낙선재에 선생의 작품들을 두루 소장하고 있었다. 그 중서 하나인 [유재]는 선생의 제자 남병길의 아호인데, 그 붓글의 멋이거니와 뜻풀이의 맛도 더불어 깊이가 있어 함께 소개한다.
留齋
留不盡之巧以還造化
기교를 다하지 아니하고 남김을 두어 조화에로 돌아가게 하고,
留不盡之祿以還朝廷
녹봉을 다하지 아니하고 남김을 두어 조정으로 돌아가게 하고,
留不盡之財以還百姓
재물을 다하지 아니하고 남김을 두어 백성에게 돌아가게 하고,
留不盡之福以還子孫
지복을 다하지 아니하고 남김을 두어 자손에게 돌아가게 한다.
阮堂題
선생은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에 역점을 두어 일평생 강조했는데, 문자향이란 문자에 향이 서려야함을 서권기란 서책을 두루 섭렵하여 그로 기운이 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팔뚝 아래 삼백아홉 옛 비문 글씨가 들지 아니하면 하루아침 사이에 쉽게 나오기가 어려운 것이다.”, “가슴속에 오천 권의 문자가 있어야 비로소 붓을 들 수 있다.”라 하여 학문하는 자세를 주창했다. 또, 평생지기인 권돈인과의 편지글 속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남아있다.
“내 글씨는 비록 말할 것도 못되지만, 나는 일흔의 평생에 벼루 열 개를 밑창 냈고 붓 일천 자루를 몽당으로 만들었다.”
벼루 열 개와 붓 일천 자루!! 뉘 감히 흉내나 내겠는가.
만년에 선생은 또다시 함경도 북청에 일 여년 유배를 당하고, 이후 과천으로 거처를 옮겨 거하게 되는데 그맘때의 작품으로 다음의 대련이 전한다. 글씨는 추사체 완성을 오롯이 이루고 의미는 선생의 일생을 온전히 담았다.
大 烹 豆 腐 瓜 薑 菜
高 會 夫 妻 兒 女 孫
가장 좋은 반찬은 두부 오이 생강나물이오,
제일 가는 모임은 부부 자녀 손녀손자이라.
왕가의 외척가문, 사대부 중의 사대부로 학문적 정치적 공적과 명예를 모두 이루고선 유배까지 그것도 두 번이나 당하는 생을 살아보니, 인생이란 무엇보다 소소하고 가차이에 있는 것들이 제일가는 즐거움이라는 선생의 절절한 감회이리라. 평생에 걸쳐 쓴 삼백여개의 아호는 또한 선생의 일생이 얼마나 광활했는지 보여낸다. 여생은 현 삼성동의 봉은사서 지내게 되는데, 유작 판전[板殿]을 마저 쓰고서 향년 71세 그 파란만장하고 홍황숭심洪荒崇深했던 생에 획을 맺었다.
당시 선생에 대한 세간의 평으로, ‘본래 시와 문장의 대가이나 글씨의 명성에 그가 가려졌다’라 했고, ‘秋史之才 鑑賞最勝 筆次之 詩文又次之; 추사의 재능은 감상이 가장 뛰어나고, 붓글이 다음이오, 시와 문장이 그 다음이다’라 했다.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는 ‘추사는 일생에 역대 명필을 두루 익히고, 만년의 제주유배 이후 비로소 하나의 서법을 이루어 그 유묵을 완상하면 마치 바닷물이 밀려오는 듯하였다’라 평하였다. 선생이 남긴 다음의 문장은 선생의 격을 잘 드러낸다.
“비록 9999분에 이르렀다 해도 그 나머지 1분을 원만히 성취키가 가장 어렵다. 9999분은 대개 이룰 수 있겠으나, 남은 이 1분은 사람의 힘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오, 그렇다고 사람의 힘 밖에 있는 것도 아니다.”
동아시아 서예사에 있어서, 진(晉)에 왕희지, 당(唐)에 구양순, 송(宋)에 소동파, 명(明)에 동기창이 있다면 청(淸)나라의 시기에는 김정희가 있다 평한다. 入古出新! 옛것으로 들어가 새로이 창조로 나오는 그 뜻을 선생은 일생에 오롯이 그리고 여실히 행하여 세계에 만대에 귀감이 되는 바, 우리는 이를 긍지로 또 보배로 삼아 그 뜻을 이어 써 나아가야 할 것이다.
글 三樂(삼락) 박민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