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산에서 다뉴브강까지, 64년을 쓴 사람 – 故 김운하 오스트리아 한인연합회 편집고문

마산에서 서울로, 로스앤젤레스를 거쳐 린츠까지.
故 김운하 편집고문, 예순네 해 동안 세 나라에서 신문을 만들다.

故 김운하 오스트리아 한인연합회 편집고문이 지난 9월 13일 오스트리아 린츠에서 별세했다. 향년 88세다. 1937년 경상남도 마산에서 태어나 1962년 언론계에 들어선 뒤 64년 동안 한국과 미국, 오스트리아를 무대로 기자이자 발행인으로 일했다. 세 나라에 걸친 그 시간의 상당 부분은 고인 자신이 글로 남겨 두었다. 그가 생전에 직접 쓴 문장, 그리고 그의 생애를 기록한 자료를 따라 한 줄씩 되새기며 정리해 본다.

故 김운하 오스트리아 한인연합회 편집고문

고인은 1937년 12월 25일 마산에서 태어났다. 증조모 형제가 인천내리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이래 4대째 기독교 집안이었고, 친손과 외손을 통틀어 맏손자였다. 생일이 성탄절과 겹친 탓에 해마다 그날은 분주했다. 고등학생 때와 청년 시절에는 교회 성가대 지휘를 맡아 성탄 전야 찬양을 마친 단원들이, 조선일보 초년 기자 시절에는 성탄 전야 야간 근무를 끝낸 후배 기자들이 아침이면 생일을 축하한다며 집으로 몰려들었다. 고인은 그 시절을 두고 “나의 생일날엔 평생 바빴다”고 적었다. 어머니는 “겨울소가 아무 할 일이 없는 오전 10시에 태어났으니 네 팔자가 평안하게 전개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지만, 돌이켜 보면 그렇게 편안하지는 않았다는 것이 본인의 술회였다.

마산고등학교 1학년 때 ‘청운회’라는 학생 모임을 만들었다. 조직을 만들고 사람을 모으는 일은 그 뒤로도 계속됐다. 연세대학교 법과대학에 진학해서는 12사도 클럽과 가고파동우회를 만들어 학생운동을 했고, 뒷날 미국 남가주대학교 대학원 과정 2년을 수료하고 동산불교대학도 졸업했다.

훗날의 거처를 미리 예고한 것처럼 보이는 기억이 하나 있다. 고인이 다닌 고등학교에는 음반이 한두 장밖에 없었는데 그중 하나가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아름답고 푸른 다뉴브」였다. 학교는 수업 전과 점심시간마다 교무실에서 그 판을 틀었다. 음악을 유난히 좋아하던 학생은 스피커로 흘러나오는 그 곡을 오래 기억했고, 뒷날 자신의 글에 그 경험 때문에 다뉴브강과 오스트리아 음악에 깊은 애착을 갖게 됐다고 적었다.

같은 시절 마산문창교회에서 평생의 동반자를 만났다. 1954년, 고인은 마산고등학교 학생이었고 김충자 편집인은 마산여자중학교 2학년이었다. 두 사람은 교회 학생회의 음악부 부장과 차장을 맡았고 학생성가대의 지휘자와 반주자가 됐다. 김충자 편집인은 고인이 만든 청운회 회원이기도 했다.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종교음악과에 들어가 피아노를 전공한 뒤에는 먼저 진학해 있던 고인의 학생 모임에 가입해 함께 활동했다. 오랜 교제 끝에 두 사람은 1963년 3월 7일 마산문창교회에서 김석찬 목사의 주례로 결혼했다. 고인은 결혼식이 끝난 그 순간부터 아내에게 존댓말을 쓰기 시작했다고 적었다. 주위에서 모두 놀랐다고 하는데, 그 말투는 60년 넘게 바뀌지 않았다.

1950년대 마산문창교회 학생성가대. 고인이 지휘를, 김충자 편집인이 반주를 맡았다

언론계 입문은 1962년이다. 조선일보에서 10년을 일하며 견습기자 세 기수에 걸쳐 시경 캡을 맡았고 차장대우까지 올랐다. 한국기자협회 회장직무대행으로도 활동했다. 신혼살림은 서울 서대문구 창천동에 차렸다. 김충자 편집인은 1966년 신촌에 피아노 교습소를 열어 제자를 길렀다.

음악은 그의 생애 내내 옆자리를 지킨 취미이자 언어였다. 1968년에는 서울가족합창단을 만들어 초대 단장을 맡았다. 지휘는 작곡가 이수인, 반주는 김충자 편집인이었다. 좋은 노래 부르기 운동을 표방한 이 합창단은 방송국과 텔레비전에 출연했고, 부부가 미국으로 떠날 때까지 활동을 이어 갔다.

1968년 서울가족합창단 창단 기념

1971년부터 이듬해까지 고인은 기자와 한국기자협회 임원으로 언론의 자유 문제에 관여했고, 그 무렵 특파원으로 미국에 파견됐다. 고인은 자신의 글에서 1972년 6월 로스앤젤레스에 부임했다고 적었다. 그러나 특파원 자리는 오래가지 않았다. 시집 『다뉴브 연가』의 편집을 맡은 김형윤 시인은 그 시집 보도문에서 고인이 “34살 그때부터 아내와 함께 원치 않았던 디아스포라의 삶을 받아들여야 했다”고 적었다. 김충자 편집인은 1973년 1월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갔다.

고인은 곧 조선일보를 사임하고 미주동아일보 편집국장으로 옮겼다. 김충자 편집인도 같은 신문사 광고부에서 일했다. 그러나 한국의 언론 통제는 미국까지 미쳤다. 뜻대로 언론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자 고인은 미주동아일보를 떠났고, 1974년 신한민보 발행인 겸 사장으로 취임했다. 김충자 편집인은 같은 신문사 전무 겸 부사장이 됐다. 이 신문의 사장으로 고인은 24년을 일했다. 해외사상계 발행인과 미주조선통신사 사장도 그 시기의 직함이다.

여기서 짚어 둘 것이 신한민보라는 신문의 내력이다. 신한민보는 1905년 창간돼 도산 안창호가 이끌던 미주 독립운동의 지도 단체 대한인국민회의 기관지로 발행된 신문이다. 고인이 발행하던 1983년 8월 11일자 지면에도 제호 옆에 ‘창간 1905년’이 찍혀 있다. 영문 제호는 The New Korea였다.

1983년 8월 11일자 신한민보 1면. 제호 아래 영문 이름 The New Korea와 발행인 겸 편집인 김운하가 적혀 있다

그리고 그 신문의 사장을 10년 동안 지낸 사람이 고인의 조부 김형순이다. 김형순은 1903년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이민들의 통역관으로 미국에 건너가 사업에 성공한 뒤 독립운동에 기여했다. 대한인국민회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장을 10년 맡았고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재정위원장도 지냈다. 서훈은 한참 뒤에 이뤄졌다. 동백장과 모란장에 이어 2012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고, 조모 김덕세에게는 2014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손자가 사장으로 일한 신한민보사의 주소는 로스앤젤레스 웨스트 제퍼슨대로 1368번지였다. 조부 김형순이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위원단으로 찍은 사진의 배경 건물 번지수도 1368이다.

1967년 조부 김형순, 조모 김덕세와 함께

조부 김형순의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위원단 시절. 건물 번지가 1368이다

집안에는 신문을 만든 사람이 더 있었다. 큰고모부 김용중은 신한민보 영문주필을 3년 지낸 뒤 워싱턴에서 영문 잡지 『Voice of Korea』를 발행하고 같은 이름의 라디오 방송으로 한국의 사정을 미국 사회에 알렸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외교위원장과 중경 임시정부 워싱턴 외교대표부 대표를 맡았으며 별세 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작은고모부의 부친 김호 역시 신한민보 사장 겸 대한인국민회 중앙집행위원장을 지냈다. 선친 김유진은 해방 뒤 만주에서 돌아와 마산에서 신문 지국장을 맡았다. 고인은 훗날 집안 이야기를 길게 적은 이유를 스스로 밝혔다. “가문의 나라와 겨레사랑의 정신과 애국언론의 전통, 동포사회 봉사의 정신을 잘 지켜 왔고, 가문의 공적수상 전통에도 낮은 급의 포장이지만, 장손으로써 그 계보에 적을 올리게 된 의의가 큼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미국에서의 활동은 신문 밖으로도 넓어졌다. 1975년 2월 조국민주회복국민회의에 운영위원으로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조국민주회복 남가주국민회의 공동의장을 맡았고,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미국본부 중앙위원과 한국민주화민족통일운동 미주연합위원장, 재미동포전국연합 서부연합회 수석부회장으로도 이름을 올렸다. 언론인으로서 특히 공을 들인 일은 장준하선생기념사업회를 공동 창립하고 초대 사무국장을 맡은 것이다. 1980년 3월 월간 『해외사상계』를 창간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장준하의 『사상계』와 그 정신을 해외에서 잇겠다는 것이 창간의 이유였고, 고인이 발행인, 김충자 편집인이 인쇄인이었다.

기록을 남기지 않은 활동도 있다. 고인이 통일운동의 출발점으로 꼽은 자리는 캘리포니아 샌버나디노의 에로우헤드산이다. 1979년 6월 이 산의 수련 캠프에서 ‘한국 통일맥 수련회’가 처음 열렸고, 1980년과 1981년까지 모두 세 차례 진행된 뒤 중단됐다. 프로그램도 참석자 명단도 인쇄물로 남기지 않았다. 통일이라는 말을 꺼내는 것만으로 누명을 쓰고 핍박을 받던 시절이어서 “일체의 진행 사항을 비공개, 비문서화로 진행했다”는 것이 고인이 남긴 설명이다. 기록을 업으로 삼은 사람이 스스로 기록을 남기지 않기로 결정한 드문 사례였고, 그래서 이 수련회는 참석자들의 기억으로만 전해졌다. 2022년 3월, 7년 만에 미국을 찾은 고인은 부인과 함께 그 호숫가에 다시 올라 세 차례에 걸친 회고 기행문을 썼다. 당시를 적어 둔 그 글이 통일맥 수련회에 관해 지금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기록이다.

1979년 캘리포니아 에로우헤드산에서 열린 제1차 통일맥 수련회

고인은 바쁜 신문사 생활 중에 야간 여행학교를 수료하고 금관광여행사를 열었다. 부부가 서로 존경하면서 함께 발전하고 창조적으로 살자는 것이 그가 밝힌 이유였다. 1년 뒤 신문사 부사장이던 아내가 이 회사 사장으로 취임해 11년 동안 운영했고, 고인도 사장과 회장을 역임했다.

오스트리아와의 인연은 미국 시절에 이미 시작됐다. 결혼한 뒤 부부가 회의 참석차 오스트리아를 처음 방문했을 때, 고인은 프랑크푸르트에서 비엔나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다뉴브강을 내려다보고 감격했다고 적었다. 고등학교 때 스피커로 듣던 그 곡의 강이었다. 회의 다음 날이 마침 아내의 생일이어서 피아노를 전공한 아내를 위해 택시를 대절해 작곡가들의 집과 기념관을 도는 하루짜리 음악 여행을 꾸렸다. 그때 그는 언젠가 이 나라에서 한번 살아 보고 싶다는 소원을 품었다고 했다.

소원이 실현된 날은 2005년 3월 10일이다. 부부가 딸의 초청으로 린츠에 왔고, 석 달쯤 머물 생각이 길어졌다. 고인은 훗날 블로그의 첫 글에 그 경위를 한 줄로 적었다. “딸의 초청으로 오스트리아의 린쯔(Linz)에 다니러 왔다가 머물게 되었다.” 집에서 조금만 걸으면 다뉴브 강변에 닿는 곳이었다. 그는 매일 강변을 산책하며 강의 변화를 관찰했고, 자신의 아호를 다뉴브강의 노인이라는 뜻으로 다노하옹(多瑙河翁)이라 지었다. 블로그에 쓴 또 하나의 필명은 ‘노비산 뻐꾹새’였다. 2012년부터는 부부가 비엔나 한인 순복음교회에 교인으로 출석했다.

글쓰기는 곧 다시 시작됐다. 2009년 6월 개인 블로그를 열어 「아름답고 푸른 다뉴브강가에서 사는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강변과 잘츠부르크, 브루크너에 관한 기행 에세이를 연재했다. 이 블로그가 신문으로 바뀐 날이 2012년 8월 26일이다. 그날 고인은 발행인, 김충자 편집인은 편집인으로 이름을 올리고 블로그 신문 「새로운 한국」의 발행을 선언했다. 미국에서 24년을 만든 신문의 영문 제호를 그대로 가져와 The New Korea라 적었다. 2009년 첫 글부터 2024년 말까지 이 블로그에 남은 글은 1,100건이 넘는다. 오스트리아 한인 사회의 행사 소식과 한국과 오스트리아 관계를 다룬 칼럼, 여행기와 시가 한자리에 섞여 있다. 자잘한 행사까지 날짜와 참석자 이름을 붙여 적어 둔 덕분에, 십수 년치 한인 사회 소식이 날짜별로 남은 기록이 됐다.

동포 사회의 공적인 자리도 이 무렵부터 늘었다. 2015년부터는 서울에서 발행되는 재외동포신문의 해외편집인 겸 해외편집위원으로 오스트리아 동포 소식을 한국과 재외동포 사회에 전했고, 2016년부터는 오스트리아 한인연합회 편집고문을 맡아 회지 발간과 인터넷 포털 편집에 참여했다. 월간 『객석』 오스트리아 통신원으로 이 나라의 문화와 예술을 한국에 소개하기도 했다.

한인 사회의 원로 단체가 만들어질 때는 처음부터 함께했다. 2014년 창립 논의에 참여해 창립발기인으로 이름을 올렸고, 2017년 10월 21일 발기총회를 거쳐 그해 11월 29일 오스트리아 한인원로회가 정식 출범했다. 고인은 2019년 9월 26일 제3대 회장으로 선출됐고, 같은 해 10월 29일 비엔나에서 취임 축하회가 열렸다.

그 가을은 한 번 더 기념할 일이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9년 10월 5일 제13회 세계한인의 날을 맞아 해외에서의 민주화운동과 민족통일운동, 재외동포사회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들어 고인을 국민포장 수훈자로 발표했다. 포장은 그해 10월 22일 주오스트리아 대한민국 대사관저에서 신재현 당시 대사가 전수했고, 12월 8일 비엔나에서 열린 오스트리아 한인연합회 송년의 밤에서 동포들이 보는 앞에 한 번 더 전수식이 열렸다. 고인은 정부 공적서에 세 가지를 적었다고 했다. 군사정권 시기 24년에 걸친 민주화운동, 1980년부터 2000년까지 20년에 걸친 민족통일운동, 그리고 오스트리아로 온 뒤 「새로운 한국」을 통해 10여 년간 이어 온 동포 위상 제고의 언론 봉사다.

수상 소감을 적은 글에서 그는 오랜 세월 회유와 압박이 따라다녔다는 사실도 담담히 밝혔다. 사과문 한 장, 전향서 한 장을 쓰라는 권유가 여러 경로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의 대답은 짧았다. “문제는 나에게 사과할 것이 없고, 돌아서야 할 방향이 없는 것이다.” 같은 글의 마지막 두 문장은 이렇다. “나는 나이가 들어가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눈 감는 그날까지 애국애족언론으로 글을 쓸 것이다.” 실제로 그는 그 문장을 쓴 뒤 7년을 더 썼다.

2019년 10월 22일 주오스트리아 대한민국 대사관저에서 열린 국민포장 전수식

김충자 편집인은 이 모든 일의 동역자였다. 신한민보 부사장과 「새로운 한국」 편집인을 지냈고 오스트리아 한인문화회관 이사로도 일했다. 미주 독립운동 시기에 만들어진 여성 단체 대한여자애국단의 단장을 1977년부터 맡기도 했다. 고인은 국민포장을 받은 뒤 쓴 글에 이렇게 적었다. “우리 부부는 민주화와 민족통일의 한길에서, 그리고 핍박과 박해의 노정에서 목숨을 함께 한 동지이기도 하다. 나의 국민포장은 사실은 공동수상이어야 했다.” 2017년에는 고인의 팔순 감사 기념 예배를 드렸고, 부부는 2023년 3월 7일 결혼 60주년을, 2025년 3월 7일에는 62주년을 맞았다.

2017년 팔순 감사 기념 예배에서 김충자 편집인과 함께

김운하 발행인과 김충자 편집인. 2025년 발행인 칼럼에 실린 사진이다

시는 그 동행의 기록이다. 고인은 평생 쓴 시를 오직 아내에게만 바쳤다. 2000년 아내의 환갑에 제1시집 『님의 눈물』을 100부 한정으로 만들어 선물했고, 아내의 팔순을 기념해 묶은 제2시집 『다뉴브 연가』가 2021년 2월 서울에서 출간됐다. 표지에는 허락을 받아 실은 김종학 화백의 「도라지 꽃」이 들어갔다. 고인의 시에도 도라지 꽃에 대한 애정이 있어 고른 그림이라고 그는 적었다. 편집과 교정은 『뿌리 깊은 나무』 편집장을 지낸 김형윤 시인이 맡았고, 출간 소식은 중앙일보와 한국경제, 월간 『객석』을 비롯한 한국의 여러 매체에 소개됐다.

제2시집 『다뉴브 연가』 표지

책이 나온 그해 10월 16일 오후, 오스트리아 한인문화회관에서 시집 출판과 팔순을 함께 기리는 합동기념회가 열렸다. 나기창 목사의 집례로 기념예배를 드린 뒤 축사와 음악회, 만찬이 이어졌고 하객 64명이 자리를 채웠다. 사회는 한성애 비엔나 한글학교 교장이 맡았다. 오스트리아 한인연합회와 한인원로회, 한인문화회관, 한인문우회의 전현직 대표들이 축사와 축시를 보탰고, 피아니스트 차승은이 시집에서 두 편을 골라 낭독했다. 소프라노와 베이스바리톤, 오보이스트가 무대에 올랐고 케이크는 한인원로회가 마련했다. 저녁 음식은 동포 업체들이 후원했다.

부부가 2012년부터 출석한 비엔나 한인 순복음교회의 나기창 목사는 2017년 팔순 감사 예배와 2021년 시집 출판 합동기념회를 집례했고, 이번 추모예배도 같은 목사가 맡는다. 오스트리아에서 보낸 말년의 주요한 자리마다 같은 이름이 남아 있다.

한인 사회를 보는 그의 시선은 2021년 12월 한인연합회 회지에 실린 편집고문 칼럼에 잘 드러나 있다. 한국과 오스트리아 수교의 내력을 사료로 되짚은 이 긴 글에서 그는 오스트리아 한인 동포의 정체성을 어떻게 세울 것인지를 물었다. 답은 두 겹이었다. “가장 훌륭한 오스트리아인이 되면서 가장 훌륭한 대한민국 일원이 되는” 이원적 일원성이 그가 제시한 방향이다. 같은 글의 다른 대목에서는 한민족의 정체성을 “여러 개의 꽃잎으로 된 한 송이 꽃”에 비유했다. 오스트리아 한인 사회가 문화회관과 한글학교를 함께 가진 드문 소수민족 공동체라는 사실도 이 글에서 자랑처럼 짚었다.

여든을 넘긴 뒤에도 현장 취재를 멈추지 않았다. 2022년과 2023년에는 「새로운 한국」 발행인, 오스트리아 한인연합회 편집고문, 재외동포신문 해외편집위원의 자격으로 이 나라의 정치와 외교, 문화와 예술, 한인 사회의 행사를 직접 찾아다니며 기사를 썼다. 2024년 4월 재외동포신문 해외편집인에서 물러나면서는 오스트리아 한인연합회 회지와 홈페이지에서 8년간 일해 온 이예나 기자를 후임 재외기자로 추천해 자리를 넘겼다. 그해 7월 함상욱 주오스트리아 대한민국 대사가 오스트리아 한인 언론인을 관저로 초청해 오찬을 열었는데, 고인이 이 나라 한인 역사상 처음이라고 기록한 자리였다.

2024년 7월 12일 주오스트리아 대한민국 대사관저에서 열린 한인 언론인 초청 오찬회. 왼쪽부터 고인, 함상욱 대사, 김충자 편집인, 이예나 기자

붓은 마지막까지 놓지 않았다. 2024년 4월부터 고인은 제3시집 『바우에른 봉의 노래』를 블로그에 연재하기 시작했다. 바우에른 봉은 린츠의 자택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공원이다. 무릎 수술을 받은 아내가 더는 함께 오르지 못하게 되자 혼자 오르며 쓴 시들이었다. 첫 편은 이렇게 시작한다. “님이여, / 당신과 함께 오르던 산 봉우리 / 바우에른 봉에서 첫 노래를 드려요.” 그는 이 시집에서 노년의 부부 생활과 죽음을 넘어서는 길을 주제로 삼겠다고 밝혀 두었다.

2024년 10월 10일에는 12년간 운영해 온 블로그 신문을 인터넷신문으로 바꿔 「새로운 한국 오스트리아(The New Korea Austria)」를 창간하고 발행인 겸 사장을 맡았다. 오스트리아 한인 사회에서 한국어로 만들어진 첫 인터넷신문이었다. 창간 발행사에 그는 신문의 목표 다섯 가지를 적었다. 오스트리아 한인 동포의 복지와 안녕, 750만 재외동포의 유대, 조국의 발전과 번영,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세계 각국과의 우의, 그리고 종교의 화합과 공존이다. 창간에는 여덟 사람이 이름을 올렸고, 고인은 인사문에 “이 역사적인 창간에 함께한 주현우 편집국장 등 8명의 고마우신 동참자들”이라고 적었다. 이 기사를 쓰는 사람도 그 여덟 명 가운데 하나다.

2024년 10월 「새로운 한국 오스트리아」 창간 인사를 하는 김운하 발행인

창간 당시의 김운하 발행인과 김충자 편집인

2025년에도 고인은 현역이었다. 고령에도 발행인 겸 사장의 자리를 지키며 기사를 쓰고 신문을 냈다. 1962년 서울에서 견습기자로 출발한 사람이 60년이 넘도록 마감을 놓지 않은 셈이다.

2026년 3월 23일 비엔나에서 열린 우원식 국회의장 주최 동포 및 지상사 대표 초청 만찬간담회에서 김충자 편집인과 함께

고인의 생애를 한 문장으로 줄이면 계속 쓴 사람이다. 마산문창교회의 성가대 지휘자였던 소년은 서울에서 기자가 됐고, 돌아갈 수 없게 된 뒤에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신문을 냈으며, 다뉴브강가에 이르러서는 동포 사회의 소식과 아내에게 바치는 시를 나란히 적었다. 무대는 세 번 바뀌었지만 하는 일은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2019년에 그가 써 둔 문장 그대로, 눈 감는 날까지 쓰는 일을 놓지 않았다.

글: 주현우 「새로운 한국」 편집국장 · 오스트리아 한인연합회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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