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설의 은혜 – 비엔나 감리교회 백충관 목사

연어는 모천회귀성(母川回歸性) 물고기이다. 하천에서 태어나 6cm정도 자라면 바다로 나가서 3-5년 성숙하다가 산란기가 되면 태어난 하천으로 소하(溯河)하여 산란, 방정 후 암수 모두가 자신이 태어난 하천에서 죽는다. 연어는 물을 거슬러 올라가며 자신의 본능에 충실하며 자신들이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 모천을 그렇게 갈망할 수 있을까? 그러나 연어가 산란의 장소로 올라가지 않으면 생명은 연속될 수 없다. 생명의 장소가 사망의 장소가 되는 일은 아이러니이다.

삶을 살아가는데 이치(理致)이라는 질서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지혜를 주기도 하며 삶을 풍성하게도 할뿐더러 삶의 방향과 방법을 알려주는 중요한 가치이다. 이것은 마치 공식과 같아서 사람들은 이치에 맞게 살아가게 하며 그 이치에서 이탈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치를 벗어나면 삶에 손해를 볼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일 것이다.
자녀를 가르칠 때도 사업을 경영할 때도 사람과의 사귐에도 우리는 이치에 맞게 살아가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치의 관점으로 보면 연어의 모천회귀는 역설이다. 그런데 어찌 연어의 삶만이 역설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성경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역설의 삶을 살라’고 가르치고 있다. 세상의 이치에 뿌리깊게 박혀 사는 우리네 인생의 귀에는 잘 들리지 않는 가르침이지만 아니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말씀이지만 오늘 이 역설속에 담긴 은혜를 함께 나눠보고자 한다.

먼저 역설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게 하는 인식의 걸림돌을 먼저 정리해볼 필요가 있다. 많이 들어 본 법칙을 소개하자면 ‘탈리오 법칙’이다.

우리에게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법칙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는 당한대로 돌려주고 자신의 기본적 권리를 침해받지 않는 보호 장치일 뿐 만 아니라 타인에게 해를 주지 말아야 할 제도적 장치이다. 이러한 이치는 잘 이해되며 지켜 나가는데 크게 어렵지 않다. 그러나 이 탈리오의 역설은 예수의 가르침 속에 이렇게 등장한다.

마태복음 5장 38절 이하를 보면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앙갚음하지 마라.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 대고 또 재판에 걸어 속옷을 가지려고 하거든 겉옷까지도 내주어라. 누가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주어라. 달라는 사람에게 주고 꾸려는 사람의 청을 물리치지 마라.”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여라.’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만 너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될 것이다.”

예수는 ‘탈리오 법칙’을 정면으로 거스르신다. 이 법칙에 너무나도 익숙하게 길들여져 있는 유대인들에게 오셔서 역설을 가르치신다.

오른뺨을 맞으며 오른뺨을 때렸던 이들에게 왼뺨마저 돌려 대라고 말한다.

재판을 걸어 속옷을 가려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내주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이렇게 역설적으로 살아야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탈리오 법칙’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들여다 볼 때 이해의 깊이를 더할 수 있다. 애굽에서 노예생활에 길들여져 있는 이스라엘민족에게 최소의 재산보호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리고 ‘탈리오의 법칙’에는 내 것이 중요한 것처럼 타인의 것도 중요하다는 의미도 담고 있으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가르침에 기반한 것이고 십계명 6-10계명의 내용 또한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율법의 본질적 의미는 사라지고 형식만 남게 된 것이 ‘탈리오의 법칙’이었다.

예수님은 그러한 율법의 본질을 말씀해 주시는 것이다. 형식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역설적으로 들리지만 본질적 의미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었다.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닌 율법을 완성하기 위해 오셨다는 주님의 말씀을 생각하면 이해의 도움이 될 것입니다.)

사랑의 역설

사랑을 말할 때 기브엔 테이크를 말한다. 또한 사랑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이유를 말한다. “너는 그 사람이 어디가 좋으니” 라고 질문은 이유를 묻는 것이다. 이유가 있는 사랑이 세상에서 가르치는 사랑의 일반이다. 이유가 소멸되고 이유가 충족되지 못할 때 사랑은 깨지기도 한다.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서 우리는 보다 성숙한 사랑을 배울 수 있다. 그 가르침의 내용은 일반적 사랑의 법칙의 역설이다.

너희가 만일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한다. 너희가 만일 자기한테 잘해 주는 사람에게만 잘해 준다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겠느냐? 죄인들도 그만큼은 한다. 너희가 만일 되받을 가망이 있는 사람에게만 꾸어준다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겠느냐? 죄인들도 고스란히 되받을 것을 알면 서로 꾸어준다. 그러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남에게 좋은 일을 해주어라. 그리고 되받을 생각을 말고 꾸어주어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며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그분은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다.
<누가복음 6:32-35>

자기를 사랑하는 자만 사랑하는 것, 자기한테 잘해 주는 사람에게 잘해 주는 것은 일반적 사랑의 이치이다. 믿지 않는 사람들도 그 정도 사랑은 한다고 말한다.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한다. 남에게 조건 없이 좋은 일을 해주라고 그리고 되돌려 받을 생각은 하지 말라고 우리가 그들에게 그렇게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면서 우리의 신앙의 삶 역시 역설적 신앙생활의 형태를 보여주는 것은 아닌가? 적어도 사랑의 법칙 속에 우리는 세상이 역설이라고 말하는 그 방법이 진리 됨을 삶으로 살아내야 하는 것이 아니가? 믿음의 기준이 세상의 이치를 따르는 모순적 믿음이 아닌 진리를 따를 때 세상이 우리를 역설로 보게 하는 것 이것이 참된 믿음인 것이다.

너희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해 주어라. 그리고 너희를 학대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어라.
<누가복음 6:28>

복에 관한 역설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팔복’에 관한 가르침 속에서 발견되는 역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만족할 것이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가난한 자가 행복하고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이 가르침은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큰 모순을 주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 이유가 ‘가난한 자’가 아니라 ‘부유한 자’가 되고 싶은 기복(祈福)신앙의 자세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슬퍼하기 보다는 행복하기를 소망하는 마음에 예수를 믿는 것 아닌가?

그리스도인이란 이 땅에서 살지만 소망을 하늘나라에 둔 사람들이다. 예수님의 이 가르침의 참된 의미는 여기에 있다. 이 땅에 소망을 두지 말고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라는 것이다. 하늘나라에 소망을 둔자는 세상과 구별됨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 구별됨은 세상이 알 수 없는 진리, 역설이 됩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받을 큰 상이 하늘에 마련되어 있다.
<마태복음 5장 12절>

예수님은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말씀하시며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는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많은 신앙인들은 그토록 부자가 되고 싶어 합니다. 이 역시 역설입니다.

‘복’에 대한 말씀을 세상의 시선으로 보면 역설이지만 하나님의 시선으로 보면 그것이 이치인 셈인 것입니다.

리더쉽의 역설

예수님은 제사를 세우시고 그들의 스승이 되셨다. 그러나 예수님의 삶은 제자들을 섬기는 자의 모습을 보여주셨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사이에서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
<마태복음 20:26-27>

그 당시는 로마의 식민시대로 권력에 복종하고 권력의 노예로 살아가는 시대였다. 누구든 한 자리만 차지하면 아랫사람을 착복하는 일에는 문제가 되지 않던 때였다.(마 20:25 너희도 알다시피 세상에서는 통치자들이 백성을 강제로 지배하고 높은 사람들이 백성을 권력으로 내리누른다.) 그런데 예수님은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이는 세베대의 아들의 모친이 와서 예수님에게 인사청탁을 한 장면이후에 하신 말씀이시다. 일반적으로 높은 자리에 앉고 싶은 이유는 그 권력을 가지고 강제로 지배하고 권세를 부리기 위해서이지 않는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아 되시는 예수께서 아니 스승 되시는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는 일은 매우 파격적인 사건이다. 이를 거절 하는 베드로에게 내가 너를 씻기지 않으면 나와 너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씀하시고는 너희에게 섬김의 본을 보여주기 위해 세족식을 하신 것이라고 가르침까지 더하셨다.

사명자의 역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방법 속에도 역설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아담과 하와를 살려두시고 그들을 통해 인류가 번성하게 하신 것도 역설처럼 보여 진다. 우상을 만들어 팔던 자의 아들을 부르셔서 한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셨다. 평생 남의 발뒤꿈치만 잡아대던 야곱의 이름을 개명하여 이스라엘이라고 불러주셨다. 가나안민족이 두려워 포도주를 짜는 틀에 숨어서 밀을 추수하던 기드온을 가리켜 큰 용사라고 부르셨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저주하며 부인했던 제자가 예수님의 수제자가 되었다.

세리장이로 동족의 세금을 거둬들이던 매국노와 같았던 삭개오에 집에 머무르시며 그에게 구원이 이르렀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말씀해주셨다.

대제사장의 뜰에서 예수님을 부인하며 저주하던 베드로는 얼굴도 들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창피를 경험한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증언하는 사도로 쓰임 받는다.

역설적이다.

바울은 어떠한가 그렇게 예수의 도를 따르는 자들을 핍박하고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옷을 맡아 주며 증인의 역할을 하지 않았는가 여전히 살기가 등등하여 다메섹에 가서 그리스도의 도를 쫓는 자들을 색출하기 위해 가지 않았는가?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나쁜 자이다. 그러나 그런 자가 예수를 만나고 변화되었다. 바울은 언제나 자신을 괴수중에 괴수라고 고백하지 않는가? 그런 괴수가 최고의 복음 증거자가 되었다. 역설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이들만이 아닌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네의 모습 역시 매일 반복되는 죄를 범하며 살지 않는가? 원하는 바 선을 행하지 않고 원치 않는바 죄를 행하는 것 역시 역설이다. 그렇게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가장 소중한 자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셨다. 역설이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 내가 어떻게 살았고 어떤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세상과 다른 이치 역설이다.

지금까지 역설의 가르침을 성경을 통해서 분류해 보았다. 어느 것 하나 쉽게 여겨지고 만만한 가르침이 없다. 예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시며 율법의 짐에서 자유로울 것을 말씀하신다. 내 멍에를 메라고 말씀하신다. 그 멍에는 쉽고 가볍다고 말씀하신다. 이것 또한 역설이다. 그러나 무거운 짐은 홀로 지는 것이지만 멍에는 같이 메는 것이다. 내 겉에서 항상 그 멍에를 같이 지고 계신 주님이시기에 그 멍에가 쉽고 가벼운 것이다. 쉽지 않는 그 길을 같이 가시는 주님을 의지하며 세상의 역설의 삶을 살아가길 바란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마태복음 11: 28-30>

우리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 마리의 연어와 같은 존재인 것 이다.

적어도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기 위해서는 세상이라는 물을 거슬러 올라가야만 한다.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물을 거슬러 오르는 길은 고통뿐만 아니라 죽음의 두려움이 있다는 것을 그러나 거슬러 올라가야지만 그리스도의 참된 생명을 이어갈 수 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살리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릴 것이다.
<누가복음 17:33>

* 성경의 본문은 공동번역을 사용하였습니다.

글 백충관 목사 (비엔나 감리교회)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