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먼인터뷰] 저서 ‘프란체스카 리 스토리’의 독일어판을 출간한 이순애 작가를 만나다

 

올해는 1892년부터 시작된 한국과 오스트리아의 수교가 130주년을 맞은 해이다. 당시 고종 29년의 조선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간의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면서 최초의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고 이후 혼란스러운 근대 역사를 지나 대사급 외교관계는 1963년에 정식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한국과 오스트리아의 관계는 가장 친밀한 형태로 이어져 오고 있었다. 바로 해방 후 대한민국의 1대 영부인 프란체스카 도너 여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 출신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일대기를 소설처럼 다룬 책이 최근 독일어판으로 출간이 되어 주목을 받고 있다. 이 책을 쓴 이순애 작가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Q. 만나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어떻게 오스트리아에 오게 되었는지, 또 하시는 일은 무엇인지 자유롭게 소개해 주세요.

안녕하세요. 저는 이순애라고 합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남편 성을 따라 Fink를 쓰고 있어요. 저는 사실 육상선수 출신이에요. 중고등학교때 몸이 약해서 운동을 시작했는데 재능을 발견하고 육상선수가 되었지요. 전국체전도 나가고 국가대표로 선발되어서 1970년대 일본, 싱가폴, 대만 등 국제 대회에 100미터 단거리 선수로 참가했어요. 타이완 아시안 선수권대회에서는 금메달을 따기도 했습니다. 이후 이화여대를 체육과를 졸업하고 1980년에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유학을 갔는데 스페인어를 배우는 곳에서 우연히 남편을 만나 한국행에서 돌연 오스트리아로 시집을 오게 되었어요.
원래는 한국에서 졸업 후 체육관계 일을 하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유럽에서는 한계가 있어서 1990년에 가이드 라이센스를 취득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인스부르크 한국 관광객 투어가이드로 25년 정도 일했지요. 그런데 가이드 일을 하면서 한국 관광객에게는 오스트리아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하고 사람들이 알아가는데, 반대로 현지 사람들은 한국을 전혀 모르는 것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시 한국은 잘 알려지지도 않았고 항상 북한이니, 큰 사고 같은 뉴스만 소개되어서 부정적인 인상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제가 현지 음악 공연팀을 꾸려서 한국의 지방 축제에 공연을 하고 또 같이 한국 관광을 하면서 한국을 소개했어요. 또 한국 음악팀도 오스트리아 축제에 불러서 소개를 하는 일도 했고요. 현재는 티롤 지방의 한국 명예 영사 리차드 하우저(Herr. Honorarkonsul Richard Hauser)의 Assistant로 일하고 있습니다.

1972년 국가대표 육상선수로 출전한 아시아선수권대회
국내외 대회에서 수상한 메달들
1989년 이화장에서 프란체스카 여사를 만난 이순애 작가

Q. 선수 출신으로 가이드와 공연일까지, 정말 다채로운 경험들을 하셨네요. 그런데 또 어떻게 프란체스카 여사에 대한 글을 써서 책으로 내셨는지 그 계기가 정말 궁금합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체육과를 나온 사람이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죠. 그래서 쓰면서도 위축이 된 적도 많았어요. 그러나 제가 프란체스카 여사님을 알고 나서는 정말 이걸 꼭 알려야겠다, 그런 감명이 있었어요. 제가 1989년에 한국에 잠깐 들어와서 동문 모임에서 우연히 프란체스카 여사님의 며느님이신 조혜자 여사님을 만나게 되었어요. 제가 오스트리아에서 왔다는 말을 들으시고는 저에게 이화장에 와서 프란체스카 여사님을 찾아뵈라고 하셔서 실제로 여사님을 만나 뵙게 되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저도 프란체스카 여사님에 대해 전혀 몰랐거든요. 많은 분들이 호주댁, 아니면 미국댁이라고 불러서 저도 호주 출신이신 줄만 알았어요. 그런데 우리나라 1대 영부인이 오스트리아 출신이라는 것을 저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 출신인 남편도, 주변인들도 모르는 것을 보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지요. 1991년에 여사님이 아직 돌아가시기 전에 한번 더 뵙고 나서 이 분에 대해 한국과 오스트리아에 알려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어요. 여사님 고향도 직접 찾아가 보고, 가족들이나 지인도 수소문 해보고 자료를 모았어요. 원래는 자서전처럼 쓰려고 했었는데 현존하는 자료가 부족했기 때문에 픽션을 섞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죠. 여사님이 오스트리아에서 한국으로 시집가신 것처럼 저도 한국에서 오스트리아로 시집을 왔잖아요? 저와 같은 설정인 주인공 순이가 가이드를 하다가 프란체스카 여사님을 만나서 그 분의 회상을 통해 이야기를 듣는 구성으로 책을 썼어요. 처음부터 저는 오스트리아에서 출간을 하고 싶었는데 여러가지 여건상 일단 2005년에 한국어로 먼저 출간을 했어요. 계속 번역본을 출간하려고 시도를 했는데 상황이 계속 한계에 부딪혀서 거의 포기 상태였거든요. 항상 제 마음에 숙제처럼 남아있었죠. 그러다가 2022년이 한오 수교 130주년이라는 소식을 듣고 다시 힘을 얻어 번역과 검수를 끝내고 올해 독일어판을 출간했습니다.

Q. 독일어판 발간을 축하드립니다! 이 책을 쓰시기까지 자료 수집을 비롯해서 15년이 넘게 걸렸다고 들었습니다. 집필하시면서 특별히 어려웠던 점이나 또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듣고 싶습니다.

가장 먼저, 제가 글쓰기를 배운 것도 아니고 정식 작가가 아니다보니 스스로의 한계를 많이 느꼈죠. 중간 중간 그만두고 싶은 위기도 있었어요. 그리고 남아있는 자료를 찾는 것이 무척 어려웠어요. 여사님이 1900년에 태어나셔서 1991년에 돌아가셨거든요. 근대의 격동기에 오스트리아도, 한국도 내부적으로 굉장히 혼란스러운 시기를 보냈기 때문에 남아있는 자료가 별로 없었어요. 저는 정말 여사님을 알리고 싶은 마음이 우러나와서 끝까지 쓴 것 밖에 없어요.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나 스스로한테 약속을 하고 쓴 거죠. 내가 살고 있는 오스트리아에서 나의 고향인 한국에 시집 온 영부인을 모른다는 것이 너무 속상했거든요.

그렇게 완성한 한국어 원고를 가지고 한국 출판사를 두드렸는데 가장 먼저 랜덤하우스 출판사에서 바로 통과가 되었어요. 그렇지만 또 한편에서는 이승만 정권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하지 않는 국민 분위기 속에 왜 하필 이런 책을 내려고 하느냐는 질문도 받은 적이 있어요. 하지만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승만 대통령도, 정치 이야기도 아닌 한 오스트리아 여인의 일대기예요. 세계대전을 다 겪고 아시아의 나라에 와서 또 한국전쟁까지 겪은 한 여인. 지금시대의 국제결혼도 참 쉽지 않은데 30년대의 국제결혼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나와 뒤바뀐 입장에 있는 여사님에 대한 동병상련의 마음도 있었던 것 같아요.

또 독일어판 번역도 참 쉽지 않았어요. 번역을 하고 감수를 받아서 출판사에 보냈는데 번번히 좋은 답을 받지 못해 다시 한번 한계를 느끼기도 했어요. 이쯤에서 그만 포기하고 다른 사람에게 이 일을 맡기려고까지 했어요. 그러다가 Ritzberger 사장이 저를 찾아왔어요. 그 분 딸이 한국 드라마와 K POP에 빠져서 도대체 이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 궁금해서 한국에 대해 검색을 하다가 프란체스카 여사를 알게 되었고, 제가 책을 발간한 사실을 알게 된 거죠. 그 분이 저에게 “미안하고 고맙다”라고 하시더군요. 그동안 몰라서 너무 미안하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알리고 책을 내줘서 고맙다고요. 그래서 독일어판과 영어판 출간을 이 출판사에서 하게 되었어요. 지난 9월 30일에 독일어판이 나와서 10월 2일에 Musikverein에서 열린 한오수교 130주년 기념 연주회 때 제 책을 소개하게 되었어요. 또 한국에서는 10월 26일에 오스트리아 국경일 행사가 있었는데 거기에서도 제 책을 소개했어요. 당시 행사에 참석한 오스트리아 외무부장관에게도 제 책을 선물했고요.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라는 말이 생각났어요. 그동안 수많은 좌절을 겪기도 했지만 우리나라의 국격이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이 높아지고, 또 한오 수교 130주년을 맞은 이 시기에 독일어판을 출간하게 된 것이 알맞은 때라는 생각이 들어요.

올해 10월 26일 한국에서 열린 오스트리아 국경일 행사에 초청되었다. 좌측부터 이순애 작가, 오스트리아 외무부장관, 오스트리아 대사, 조혜자 여사님(프란체스카 여사 며느님)
1999년 당시 오스트리아 대사였던 반기문 사무총장과 함께
2022년 9월 프란체스카 여사에 대한 책의 독일어판이 출간되었다.

Q. 책을 읽은 주변 오스트리아인들의 반응이 어떠했는지요. 또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다들 이런 일이 있었냐, 놀랍다 등의 반응이 대부분이었어요. 한국의 첫 번째 영부인이 오스트리아 출신이라는 것을 그동안 몰랐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라기도 하더라고요. 오스트리아의 신문사와 잡지사에서도 인터뷰 일정이 잡혀져 있고요, 낭독회(Lesung)도 몇 군데에서 준비하고 있어요. 또 독일어판을 출간한 Ritzberger지 모회사가 영화사이기 때문에 영어판 출간 이후 프란체스카 여사 이야기를 다룬 영화나 시리즈 제작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고 있어요.

그 밖에 제 개인적인 바람으로는 오스트리아를 넘어 유럽과 미주에서도 낭독회를 열고 싶어요. 이미 2세대, 3세대가 들어선 해외의 한인 사회를 보면서 새로운 세대들이 한국의 역사에 대해 제대로 잘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국’하면 K POP, 드라마나 영화는 잘 알지만 정작 우리나라가 어떤 역사를 가졌고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영어판이 나오면 프란체스카 여사가 사셨던 하와이, 뉴욕을 직접 찾아가 젊은 한인들을 만나서 소개하고 싶어요. 이게 저에게 주어진 새로운 과제라는 생각이 들어 또 가슴이 뜁니다.

Q. 이외에도 오스트리아와 한국의 문화홍보를 위해 하신 활동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떤 것들이 있는지 간단히 소개해 주세요. 또 양국의 문화 홍보대사를 하면서 느끼신 소회를 듣고 싶습니다.

제가 운동선수 출신이기 때문에 스포츠와 관련된 한국 홍보대사를 많이 했습니다. 특히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한 강원도 홍보대사로 임명을 받아 세계 IOC 총회 국제 스포츠 행사에 다니면서 유치운동에 참여했었어요. 또 오스트리아의 Musikkapelle를 데리고 한국 지방 공연을 다니고, 한국의 전통 공연을 오스트리아의 축제에 소개하는 사업도 했고요. 사실 사업이라기보다는 이것도 저의 마음에서 했던 활동들이었죠. 저의 친정나라와 시댁나라가 서로 가까워지기를 원하는 마음이요. 한국에 대해서 무지한 사람들에게 ‘백문이불여일견’이라는 속담을 인용해서 무작정 데리고 한국에 가서 공연도 하고 관광도 하면서 한국을 소개했어요. 그동안 부정적인 시각을 가졌던 오스트리아 사람들이 한국을 처음 와 보고 너무 좋아하고, 아름답다고 칭찬을 하는 걸 보면서 저도 오히려 그들의 시선을 통해 우리나라의 아름다움을 새롭게 발견하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했답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2005년에 *국민포장을 받기도 했어요.

2005년 국민포장 수여식, 남편 Herr Univ. Doz. Ra. Dr. Herbert Fink, 당시 주오스트리아 대사인 조창범 대사와 함께

Q. 끝으로 오스트리아 한인들에게 전하실 말씀이 있다면 부탁드립니다.

타지에서 사는 것이 쉽지만은 않을 때가 많이 있는 것 같아요. 나와는 다른 언어, 문화, 사회, 사람들을 보면서 위축되는 때도 있고요. 그렇지만 제가 프란체스카 여사에 대해 글을 쓰고 알리면서 한국과 오스트리아가 서로 사돈 나라라는 사실이 오스트리아에 사는 저에게 큰 자긍심을 주더라고요.

프란체스카 여사가 한국으로 가서 살았듯이 오늘날 이 곳으로 와서 살고 있는 우리들도 한국인으로서의 자긍심을 가지고 서로의 다름을 즐기며 살았으면 좋겠어요.


* 국민포장은 정치·경제·사회·교육·학술분야 발전에 기여한 공적이 뚜렷한 자와 공익시설에 다액의 재산을 기부하였거나 이를 경영한 자 및 기타 공익사업에 종사하여 국민의 복리증진에 기여한 공적이 뚜렷한 자에게 수여한다. (출처: 대한민국 상훈 https://www.sanghun.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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