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바라 봄 – 클라겐푸르트 한인교회 최선 전도사

클라겐푸르트 한인교회 최선 전도사

봄기운이 완연한 나날입니다. 길을 지나다니다 보면 사람들의 옷차림뿐만 아니라 표정에서도 봄의 기운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온갖 일들이 벌어지는 바쁜 세상이지만, 그래도 봄은 우리에게 그동안 얼어붙어 있던 마음을 녹이라며 부추기는 것 같습니다. 하루는 딸아이와 공원을 산책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유난히 따뜻한 햇살을 즐기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윤서야, 날이 너무 따뜻하다. 진짜 봄이 왔나봐. 윤서는 봄이 온 것을 어떻게 알아?”

“응. 며칠 전에 친구들이랑 놀고 있는데, 꽃이 핀 것을 봤어.”

아이의 대답을 들으며 봄이 되어 꽃이 피는 것이 아니라, 꽃이 피어 봄이 오는 것이라는 말이 생각났습니다. 어느 쪽이든 간에 봄은 참 좋은 계절입니다. 생명의 기운을 마음껏 뽐내는 봄은 ‘날 좀 보세요’ 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봄의 외침에 얼마나 응답을 하고 있습니까. 미쉘 꽈스트 신부는 “끊임없는 활동이란 현대의 가장 무자비한 우상 중의 하나이다. 우리는 할 일이 너무나 많고 그러면서도 무엇이건 다 하려 든다”고 말합니다. 현대 사회는 우리가 삶을 분주하게 사는 것이 옳은 길이라고 주장합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가 나누는 첫 인사말이 “바쁘시죠?”가 되어버렸습니다. 사회적 신분을 나타내는 척도가 된 분주함 속에 누군가를 대접해주기 위해 우리는 바쁨을 서로 강요합니다. ‘빨리 빨리’를 외치는 세상이 역동적이기는 하나 그곳에서는 아름다운 것을 아름다움으로 경험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자신만의 속도를 잊어버린 채, 세상이 정해준 속도에 따라 또는 그보다 더 빨리 달리려고 합니다. 또한 누군가가 나를 앞서갈지도 모른다는 조바심으로 늘 마음의 여유가 없습니다. ‘여유 없음’으로 인하여 따뜻한 봄을 누리지도 못한 채 메말라가는 우리의 삶을 보곤 합니다.

분주함을 나타내는 분주할 망(忙)자와 잊음을 나타내는 잊을 망(忘)자는 부수인 ‘마음 심’ 자의 위치만 다를 뿐 똑같은 글자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즉 분주함과 잊음은 연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분주하면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기 마련입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우리의 근본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잠언 1장 7절)

잠언의 핵심 구절이 되는 말씀인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는 구절은 우리에게 익숙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경외’라는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경외는 벌 받을 것에 대한 ‘두려움’에 할 수 없이 굴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경외란 우러러볼 줄 아는 능력입니다. 즉, 모든 것 속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보는 능력입니다. 그분의 존재 앞에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식하며 살아야 하는데, 우리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허다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한다면서 빠른 세상의 속도에 맞추어 사느라 하나님께서 만드신 창조물을 무심히 스쳐지나가는 모습이 그러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은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솜씨에 경탄할 수 있는 영적인 감수성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몇 년 전 광화문의 한 빌딩에 부착된 한 시구가 심금을 울렸습니다. 바로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라는 짧은 시입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단순하기에 많은 이들이 쉽게 암송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마음의 울림이 크게 전해지는 시입니다. ‘자세히’ 보고, ‘오래’ 보아야 비로소 사물이나 사람의 진면목이 드러납니다. 하지만 우리는 빠른 속도 속에서 대충, 빨리 보는 것에 익숙합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보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고백하면서, 결국 하나님의 솜씨는 제대로 보지도 못하는 어리석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어서 창문을 열고 피어나는 꽃들을 바라봅시다. 노래하는 새들에 귀를 기울입시다. 모든 피조물 속에서 하나님을 볼 줄 아는 사람이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앞에서 소개한 나태주 시인은 <풀꽃>에 이어 <풀꽃 2>이라는 시를 지었습니다.

이름을 알고 나면 이웃이 되고
색깔을 알고 나면 친구가 되고
모양까지 알고 나면 연인이 된다
아, 이것은 비밀.

우리는 서로의 이름도 색깔도 모양도 모르기에 진정한 이웃도 친구도 연인도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과 조화를 이룰 줄 아는 사람입니다.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나 자신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도 역시 하나님의 창조물이기 때문입니다.

한병철 교수는 <아름다움의 구원>이라는 책에서 타자에게 수모를 안겨 주고 혐오감을 표현하지 말고 타자들의 ‘은폐된 아름다움에’ 눈을 뜨자고 말합니다. 우리는 내 이웃을 ‘자세히’보고, ‘오래’ 보면서 그 안에 살아 숨 쉬는 하나님의 숨결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오늘도 일상 가운데 살아있음이 신비입니다. 내가 신비인 동시에 타자의 존재 또한 신비입니다. 평소에 내 기준에 따라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를 있게 하신 분도 하나님임을 알고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솜씨를 바라보고 경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존재 속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보는 사람은 ‘악’에서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분주함이라는 변명과 이유, 또한 헛된 자만심으로 우러러보는 능력을 잃어버릴 때 우리 영혼은 사막이 되어버립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을 보고 경탄할 때, 그것을 소중히 여기고 아낄 때입니다. 길가에 피어난 꽃 한 송이, 흘러가는 강물, 곱게 물든 노을, 밤하늘을 수놓고 있는 별들, 자유롭게 뛰노는 짐승들, 숲을 깨우는 새들의 울음소리, 그리고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사람 하나하나를 하나님의 작품으로 인정하고 기뻐할 때 우리는 진정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창세기 1:31)

바라봄의 계절, 봄날에 하나님의 시선이 우리의 삶에 고정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그 시선이 만족의 시선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도 바쁜 일상을 잠시 멈추고 따뜻한 봄날에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보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솜씨에 감사하며, 내 이웃과 더불어 사랑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우리 주님께서 기뻐하실 줄 믿습니다.

글 최선 전도사 (클라겐푸르트 한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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