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비차 비디오’ 폭로로 붕괴된 오스트리아 극우보수연정과 아름다운 수습의 정치적 비결

들어가는 말

2019년 5월 17일 독일의 주간 최고 권위지 ‘슈피겔’과 남부 최고 권위 일간지 ‘쥐드도이치 차이퉁’이 ‘이비차 비디오’(IBIZA Video)를 폭로 했다. 오스트리아 전국이 발칵 뒤집어 졌다.

‘이비차 비디오’란 것은 2년 전인 1917년 여름, 스페인 관광휴양지 이비차 섬의 한 빌라에서 일어난 추악한 정치거래 시도의 장면을 폭로한 영상이다. 오스트리아 연정 자유당 당수 겸 부총리 하인츠-크리스티안 슈트라헤(Heinz-Christian Strache)와 부 당수 겸 연방의회 자유당 의원총회 회장인 요한 구데누스(Johann Gudenus)가 러시아의 한 여성 정치부호(Oligarch)와 흥정하는 대화와 장면이 역력하게 확인되는 녹화물이다.

‘이비차 게이트’(Ibiza gate)로 즉각 이름이 붙여진 이 사건이 독일에서 먼저 보도 되자, 오스트리아의 텔레비전 방송, 언론 미디어들이 이를 크게 보도하면서 ‘국가위기’가 도래했다고 혼란스러워 졌다. 일단의 비엔나 시민들이 총리청사에 집결하여 정부 총사퇴를 외쳤다.

그러자 독일 언론 보도 12시간 후 알렉산더 판 데어 벨렌(Alexander Van Der Bellen) 대통령이 수습에 나서면서 문제의 당사자 하인츠-크리스티안 슈트라헤 부총리와 요한 구데누스 자유당 의원총회 회장이 즉각 사임을 했다.

세바스티안 쿠르츠(Sebastian Kurz) 총리는 자신의 국민당 출신 재무장관을 부총리로 제청하여 혼란해진 정국을 수습하려고 했으나 사민당을 비롯한 야당연합이 연방의회를 통해 정부 총사직과 새로운 총선을 요구하자 알렉산더 판 데어 벨렌 대통령과 협의 끝에 즉각 총 사직했다.

알렉산더 판 데어 벨렌 대통령은 오스트리아 역사에 없었던 참신하고도 멋 진 발상으로 오스트리아 공화국 역사상 최초의 여성 총리와 각료 과반수를 여성 장관으로 매우는 새 정부를 순식간에 탄생시켰다. 그리고 총선을 오는 9월에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5. 17 독일 언론 폭탄’으로 연정이 붕괴된 오스트리아는 국가 정치위기를 맞은 지 17일 만인 6월 3일 오스트리아 헌법재판소 브리깃테 비어라인(Brigitte Bierlein)소장이 새 총리에 임명되면서 안정을 되찾게 되었다.

‘이비차 게이트’는 17일 동안 텔레비전과 언론을 통해서는 대단한 토론과 비판이 있었다. 그 비판은 욕질이나 막말이 아니라 헌법과 민주주의를 기초에 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것이었다. 의회도 싸움이나 고성을 지르거나 장외투쟁은 하지 않았다. 국민들도 한번 시위를 한 후 당사자들이 당장 물러가고 각료들이 전원 사퇴하자 조용히 정치적 해결의 과정을 주시했다.

오스트리아 언론뿐만 아니라 유럽언론들도 참으로 아름답게 정치위기를 수습해 간다며 오스트리아 정치의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자세와 국민들의 높은 정치의식을 칭찬했다. 오스트리아에 살고 있는 많은 동포들도 대단한 정치적 소란과 마비가 올 수 있는 정치위기가 너무나 조용하고 빠르게 수습되어 가고 있는 것을 한국의 정치상황과 비교해 보면서 매우 감탄하고 있다.

이번 ‘이비차 게이트’는 아직도 오스트리아 사회에서 러시아의 오스트리아 정치개입, 외국정치자금의 수수를 통한 불법선거자금사용, 외국정치고문과 정보원의 국내 정치 개입 등 에 대한 의혹들을 제기하고 있다. 사법당국도 이런 각도에서 수사도 진행하고 있다. 그러면서 정부장악의 목적을 위해서는 국익을 파는 매국적 수단도 마다하는 극우세력의 위험한 발상 등에 대한 경고와 토론도 계속되고 있다.

특히 러시아의 선거개입은 오스트리아에 앞서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도 나타났다. 2년여에 걸친 로버트 뮐러 특검의 조사는 러시아인들의 미국선거개입의 영향과 선거법 침해를 수사하는 것으로 모두 37명이 기소 또는 유죄를 받은 것으로 유명하게 알려져 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도미노의 현상을 일으키고 있다.
성급한 언급이 될지는 몰라도, 미, 중, 일, 러 4대 강국의 영향을 받고 있는 한국 정치에도 이런 도미노 현상은 없을 것인가, 또 앞으로 일어나지 않을 것인지, 단정적으로 말하기란 쉽지가 않겠지만, 오스트리아와 미국의 사건을 보면서, 미리 조심하고 경계하는 것은 좋은 일일 것이다.

오스트리아의 한국동포들이나 유럽의 한인동포들, 한국 국내인들 에게도 특별히 오스트리아의 이번 ‘이바차 게이트’의 전말을 알고 가는 것이 유익하지 않을까 하여 정리해 보았다. 이 칼럼은 오스트리아 양대 일간지인 ‘디 프렛세’( Die Presse)와 ‘데어 슈탄다르트’(Der Standard), 주간지 ‘큐리어’(Kurier)의 보도들과 오스트리아 현대 정치사를 중심으로 쓴 것이다.

독일 슈피겔과 쥐드도이치 차이퉁이 폭로한 이비차 비데오 사진. 하인츠-크리스티안 슈트라헤 전 부총리와 러시아 부호여인이 보인다
길게 누운 자세로 말하고 있는 슈트라헤 전 부 총리와 옆에 앉아 듣고 있는 러시아 정치부호 여인, 서 있는 요한 구데누스 전 자유당 부 당수

이비차 비디오의 내용

오스트리아 미디어 매체들이 소개한 ‘이비차 비디오’를 보면, 하인츠-크리스티안 슈트라헤 부 총리는 안락의자에 길게 앉아 술을 마시면서 말을 한다. 오른 쪽으로 러시아 정치 부호여성이 앉아서 말을 듣고 있다. 자유당 부 당수 겸 의원총회 회장 요한 구데누스는 아내와 함께 서서 이야기를 듣고 있다. 당시 이들의 보디 가드로 알려진 전 독일 형사 출신도 참여하고 있다.

오스트리아의 언론 미디어 보도들에 의하면, 슈트라헤 부총리가 이 비디오에서 말 한 내용을 한국말 식으로 요약하면 크게 나누어 네 가지이다.

  1. 자유당이 정부로 들어가면 국가 토목건축계약을 딸 수 있도록 해 줄 수 있다.
  2. 자유당에 헌금하는 것은 가능하다. 오스트리아 감사원 검사를 받지 않기 위하여 비영리기관으로 처리해야 한다.
  3. 러시아 부호는 오스트리아 최고부수의 주간지 ‘크로넨 차이퉁’(Krone Zeitung)의 주식구매로 통제하에 두고, 자유당 후보들이 의회에 많이 진출하도록 밀어야 한다. 또 ORF국영방송에 대한 영향력 증대전략을 수행해야 한다.
  4. “언론인들은 지구에서 가장 큰 창녀들이다. 크로넨 차이퉁을 인수하면 기자들을 다루고 갈아 치우기가 쉬울 것이다.”

지난 5월 17일 이 같은 말을 하는 장면이 계속적으로 보도되고, 그 말들을 글로 옮기고 논평한 보도들이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쏟아져 나오면서, 전 유럽으로 퍼져 나가자 세상은 하루 종일 뒤집어 지는 듯 했다. 오스트리아의 사건 진행을 다시 재현 해 본다.

이비차 사건으로 내각 총사퇴를 당한 세바스티안 쿠르츠 전 총리의 기자 회견

극우 자유당과 보수 국민당 연정의 붕괴

5월 18일 오전 11시, ‘이비차 비디오’ 폭로 12시간 후, 비엔나 발하우스 플랏츠의 총리청사와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호프부르크 궁전으로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텔레비전 기자들도 달려와 카메라를 설치했다.

먼저 이들 기자들은 총리 청사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엔나 시민들의 항의시위를 취재했다. 시위시민들은 “나치스는 꺼져라”를 외치며 나치스당의 후신으로 불리기도 하는 극우 자유당 당수 슈트라헤 부 총리의 사퇴를 촉구 했다.

시위시민들은 수백 명의 경찰들이 총리 청사의 입구 주위를 방어하고 있는 앞으로 바짝 밀고 나가면서 내각 총 사퇴를 외치고 “추방 투표, 추방 투표”를 소리 지르면서 새로운 총선을 촉구했다.

먼저 슈트라헤 부 총리가 낮 12시 기자회견을 가지고, ‘이비차 비디오’에 대한 해명을 하면서 사퇴 선언을 했다.

그는 이번 사건은 근거가 없고 배신자들이 만들어 낸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자신은 더러운 쓰레기 자동차와 허위 정보 전파꾼들의 희생자가 되었으나 범법사실은 없다고 변명했다. 그는 6시간 이상 술을 과하게 마신 김에 러시아 유인자에게 과장된 말들을 했는데, 결과적으로 극도로 당황스런 언사로 여겨 질 수 있는 것이기에, 사과한다고 밝혔다. 이 말을 할 때 그는 눈물을 흘렸다.

슈트라헤 부 총리는 세바스티안 쿠르츠 총리를 만나 즉시 부총리 사임서를 제출하고 물러갔다. 슈트라헤의 사임으로 자유당은 자당의 대통령 후보자였고 연립정부에서 국토건설장관으로 있는 노베르트 호퍼(Nobert Hofer) 에게 임시 당수를 맡겼다.

세바스티안 쿠르츠 총리는 오후 7시 기자회견을 가졌다. 쿠르츠 총리는 ‘이비차 비디오’ 에서 슈트라헤 부총리가 말한 권력남용의 생각은 문책을 했지만, 그러나 그 비디오는 매우 악의적인 비밀기록으로 본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17개월 동안 자유당과 연정을 해 오면서 이 연정이 성공하도록 매우 많은 노력을 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비차 비디오’에서 보듯이 슈트라헤 부 총리는 ‘마셔 넘기기가 어려운’ 면들이 있었고, 자유당은 결과적으로 정부를 운영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했다. 이런 사정으로 연정 계속을 추구하지 않고 새로운 총선을 택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총리 청사의 시위시민들이 대통령 궁으로 몰려가자 알렉산더 판 데어 벨렌 대통령은 대 국민담화를 발표했다.

대통령은 “어제 이후로 우리들에게 도달한 이미지는 도덕을 짓밟는 것임을 보여 주고 있다“며 ”슈트라헤 부 총리와 구데누스 회장은 국민들에게 매우 존경스럽지 못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고 비판했다.

대통령은 이어 “나는 정부의 신뢰를 흔들어 버린 이 같은 존경스럽지 못한 일을 참지 않겠다“며 ”이런 마음으로 쿠르츠 총리와 의논한 끝에 조기총선 실시로 의견을 같이 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대통령은 이번 사건은 슈트라헤 부총리 등 두 사람의 사퇴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고 최고 집행부와 사법기관이 가차 없는 해명을 계속 요구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같은 대통령의 담화에 따라 사법기관과 경찰이 자유당과 슈트라헤 전 부총리, 구데누스 전 자유당 의원총회 회장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다. 반대로 슈트라헤 측은 자신의 변호사를 통하여 ‘이비차 비디오’의 제작, 보급, 발행과 관련된 자들을 뮌헨 검찰국에 고소했다고 발표했다.

연방의회의 ‘리스트’(List)정파의 헌법전문가 알프레드 놀(Alfred Noll)의원의 제안으로 정부각료 총사퇴안이 제기 되었다. 야당으로 있는 사민당과 ‘네오스’(Neos)정파가 동의하고, 연정에 엉거주춤 남아 죄인 취급을 당하고 있는 자유당도 합세, 정부해체 요구안이 통과 되었다.

알렉산더 판 데어 벨렌 대통령과 세바스티안 쿠르츠 총리는 회합을 가지고 연방의회의 결정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내각의 총사퇴를 단행했다. 이로써 극우 자유당과 보수 국민당의 연정은 6월 3일 1년 5개월간의 동거에 종막을 고하게 되었다.

오스트리아 역사상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된 브리깃테 비어라인 총리

가장 아름답다는 새 정부 출범

새 정부 구성의 책임은 알렉산더 판 데어 벨렌 대통령에게 달려 있다. 대학교수 출신으로 녹색당 연방의회의원, 당수를 거쳐 대통령이 된 그는 극우-보수 정권이 붕괴된 위기를 맞아 진보적인 자기 이상을 맘 놓고 실현할 수 있는 큰 기회를 잡게 되었다.

그는 6월 3일 헌법재판소 브리깃테 비어라인(Brigitte Bierlein) 여 소장을 새 총리로, 최고 재판소 클레멘스 야브로너(Klemens Jabloner) 소장을 부총리 겸 법무장관으로 공동 임명하고, 정부조각을 위촉했다.

비어라인 새 총리는 자신의 봉급을 잘 저축하여 옷을 잘 입는 패션니스트로서도 알려진 멋쟁이 법관이다.

오스트리아 역사상 최초의 여 총리가 된 비어라인 새 총리는 조각에 나서서 국민세금을 절약하자는 모토로 14명의 각료 중 12명만 선발했다. 이 12명을 의원 다수 정당 순위대로 국민당 4명, 사민당 4명, 자유당 4명으로 배당, 선출했다.

이 중 6명은 여성으로 배당했다. 총리와 부총리가 여성이고 총리를 합하면 여성이 7명으로 각료의 과반을 넘는 사상 초유의 내각이 탄생된 셈이다. 비어라인 총리는 6월 12일 연방의회에 전원을 이끌고 나가 인사를 하면서, 새 정부각료 인선완료와 완전한 정부출범을 신고했다.

이 같은 브리깃테 비어라인 첫 여성 총리의 행보는 오스트리아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정부를 탄생시켰다는 찬사와 함께 국민들의 깊은 신뢰를 받게 되었다. ‘이비차 게이트’ 소란은 순식간에 잠잠해 졌다. 알렉산더 판 데어 벨렌 대통령도 국가위기를 맞아 훌륭한 정치적 발상으로 위기를 면하게 하면서 좋은 정부를 탄생시켰다는 찬사를 받게 되었다.

오스트리아 여성사 적으로도 최초의 역사가 될 여성 총리, 여성과반수 넘는 내각의 구성원으로 참여한 여성 각료 6명은 다음과 같다.

*부총리 겸 법무부 장관:Clemens Jabloner
*노동/사회/보건/소비자보호부 장관: Brigitte Zarfl
*경제부 장관:Elizabeth Udolf-Strobl
*여성부 장관:Ines Stilling
*교육부 장관:Iris Eliisa Rauskala
*지속성과 관광부 장관:Maria Patek

이러한 아름다운 수습을 하게 된 이유

(1) 오스트리아는 국가적 난제가 생겼을 때 좌우양극의 이념적 대립과 정치세력간의 정쟁을 피하고 합의와 상생으로 실용적인 중도적 해결책을 찾아내는 정치전통을 가꾸어 왔다.

특별히 1918년 세계 제 1차 대전의 패배로 합스부르크 제국이 무너진 후 탄생된 제 1공화국의 역사를 보면, 처음부터 정치이념의 갈등과 권력독점을 방지하기 위한 비래형 정부구성의 가능성과 비래대표제로서의 의회구성의 원리를 헌법에 규정하였다.

그러나 가톨릭교의 기독교사회당이 중심이 되는 ‘검은 진영’과 사회민주당이 중심이 되는 ‘붉은 진영’의 양극화 대립의 격화로 민주주의의 종언을 고했다. 기독교사회당의돌푸스 정권은 사병조직으로 ‘애국전선’을 창설, 1933년 마침내 폭력으로 의회를 해산하고 파시스트 독재정권을 수립했다.

사회민주당을 비롯한 좌파세력도 민병대로 ‘공화수호연맹’을 창설, 독재 타도에 나섰다. 두 세력은 1934년 2월 “검은 진영‘과 ‘붉은 진영’간의 시민전쟁으로 무력충돌, 내전을 겪었다. 많은 사상자를 내고 승리한 돌푸스 정권은 동년 5월 1일 가톨릭 보수주의 진영이 주축이 된 ‘애국전선’만을 단일정당으로 인정하는 권위주의적 연방국가로의 헌법개정을 단행했다.

그러나 게르만 민족주의자들의 제기와 나치스독일과의 맹렬한 합병운동은 1934년 7월 돌푸스 정권을 무너뜨리는 폭력 쿠데타로 발전했다. 돌푸스는 무력으로 쿠데타를 가까스로 진압하긴 했으나 히틀러의 강력한 항의에 직면, 무능한 슈수니크 에게 정권을 이임하고 사임했다.

오스트리아 민족주의 나치스의 재 부흥을 통해 히틀러는 마침내 1938년 3월 12일 독일 군대를 오스트리아로 파병하여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합병을 단행했다. 히틀러의 나치스 비밀경찰은 서로 적대시 하고 정쟁을 벌렸던 오스트리아의 좌우 양진영의 정치 지도자들을 모두 검거, 다카우(Dachau)포로수용소에 감금했다.

서로 적대시 하고 폭력투쟁까지 했던 정치지도자들은 함께 낡은 포로복장을 한 꼴볼견으로 얼굴을 대하여야 했다. 줄을 서서 함께 콩밥을 배급받아 허급지급 먹고 배를 채워야 하는 반 거지 신세들이 되었다. 괴롭고 악몽 같은 생활이었다. 서로가 부끄럽고 창피했다. 서로가 반성하게 되었다. 다시는 정치하는 사람들이 이런 수모는 당하지 않게 하자는 암묵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새로운 각오가 탄생했다. 오스트리아 정치사에서 ‘다카우 포로수용소의 치욕’은 오스트리아에 양극의 합의와 상생과 중도통합의 길을 전통화 시키는 큰 촉매제가 되었다.

(2) 오스트리아는 병합국 독일의 제 2차 세계대전의 패전으로 1945년부터 1955년 까지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4대 연합국의 공동분리지배를 받았다. 4대국의 통치시대에 각각의 정치세력들이 외세의 영향이나 영합의 유혹에 위기와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제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오스트리아 제 2 공화국 창립의 아버지 사민당의 카를 레너 대통령은 3회에 걸친 기독교사회당과의 대 연정을 통하여 합의와 상생정치의 기초를 놓으면서 국익을 기본으로 삼는 실용주의 외교를 위해 외세를 좌우양파의 협동으로 상대하는 전통을 수립, 연합국들과의 평화협정체결과 새 헌법제정의 대업을 완성했다.

이번 ‘이비차 게이트’ 사건의 취급에 있어서도 러시아의 개입설, 미국을 비롯한 외국정보부의 개입 음모설 등을 여야와 언론이 자신의 이익이나 차기 총선전략으로 악용하지 않고 지혜스럽게 다루고 있는 것은 이런 정치적 경험과 전통에서 나온 것이다.

(3) 정부의 변화와 총선의 결정이 쉽고 안정스럽게 진행되는 것은 오스트리아의 비례대표 선거전통의 확립과 좌우 연정의 성공적인 경험축적에 있다. 오스트리아의 비례대표제선거의 기원은 1920년 기독교사회당과 사회민주당의 대 타협의 소산인 제 1공화국 헌법으로 소급된다. 그러나 완전한 비례대표제의 실시는 1955년의 새 헌법 제정으로부터 비롯된다.

74년의 전통을 가진 오스트리아의 비례대표제는 정치 지망자들이 권력이나 돈을 이용하여 아무 때나 뛰어 들거나 인기가 있다고 하여 당수가 공천하는 사람들이 참여하는 그런 제도가 아니다.

양대 정당인 보수의 국민당과 진보의 사민당의 경우를 보면, 청소년부터 정치훈련 프로그램을 실시한다. 당 청소년 훈련원과 일반 당원 훈련원에 해당하는 기관들이 있다.

사민당의 경우 대학생들의 ‘사회주의 학생회’, 청년들의 ‘사회주의 청년 오스트리아’등을 통해 훈련하고 있다. 카를 래너 인스티튜트, 브루노 크라이스키 인스티튜트 등은 유망 청년당원과 간부들의 훈련기관으로 유명하다.

양 정당에는 이런 훈련원들을 통하여 성장한 당원들이 당기관이나 지방자치단체의 의원으로 진출, 연방의회 진출 비례대표 명단에 들어가도록 하여 총선비례대표 후보 명단을 확정해 놓고 있기 때문에 공천경쟁이나 낙화산 공천이 있기가 매우 힘들게 되어 있다.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역사가 짧거나 급조된 정당이나 정파도 총선과 지방자치단체 선거에 참여하여 투표자의 4%이상을 받으면 비례대표의 배당을 받아 자치정부와 연방의회에 진출할 수 있다. 이런 비례대표제도의 확립으로 국민의 선택에 따라 정부창출이나 의회개편이 빠른 시간 안에 가능한 것이 정치안정의 유지 이유가 되고 있다.

오스트리아는 이러한 비례대표제의 의회성립을 통하여 한 정당이 의회의석의 과반수를 얻지 못할 경우에는 제 2당과의 대 연정, 또는 제 3, 제 4 소수 정당과의 소 연정으로 정부를 구성하는 전통을 확립했기 때문에 정부부재의 위기를 쉽게 해결해 왔다.

(4) 오는 9월 총선까지 수명 3개월의 정부이지만, 유사 이래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여성총리와 부총리, 내각 과반수를 여성장관이 차지하는 위기수습 정부를 출범시킨 것은 알렉산더 판 데어 벨렌 대통령과 영부인 도리스 슈미다우어(Doris Schumidauer)여사, 녹색당의 공로로 생각된다.
알렉산더 판 데어 벨렌 대통령은 소수민족의 평등한 대우와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 등 헌법기관에서의 여성평등을 외쳐온 녹색당의 당수로, 영부인은 녹색당의 당 행정대표(사무총장 격)의 경력으로 대통령 궁에 들어 온 자들이다. 이번의 내각 출범은 대통령의 아이디어 이면서 녹색당 이념의 실현이라고 할 수 있겠다.

(5) 오스트리아 정치위기의 수습에는 언제나 오스트리아의 언론들이 ‘제 4 헌법기관’의 책무를 잘 지켜 온데 있다. 이번 ‘이비차 게이트’사건에서도 오스트리아 2대 일간지 디 프렛세와 데어 슈탄다르트를 비롯한 21개 언론 매체의 편집국장들이 ‘이비차 비디오’주역들에 대한 비판과 책임추궁, 엄정한 수사, 헌법정신에 따른 정치위기의 조속한 진압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들 언론계 대표들의 성명은 슈트라헤 전 부총리의 언론인들에 대한 지독한 욕설에 대한 반응이기도 하다.

오스트리아의 언론계 판도는 인구 880만 중 200만이 살고 있는 비엔나의 디 프렛세와 데어 슈탄다르트 2개 일간지들, ORF국립방송국이 주도권을 행사하고 있는 판국을 보여 주고 있다.

비엔나는 19세기 후반부터 진보주의자가 많은 데에다 이런 기반 위에서 시정을 사민당이 수십 년간 지배해 왔기 때문에 양대 일간지 뿐만 아니라 ORF국립방송 까지 보수정권하에서도 진보성향이 강한 논지를 펴 오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대언론기업 발행의 황색 주간지들이 있기는 하나 합리와 이성이 중심논지로 작용하는 ‘제 4부’로서의 언론 전통이 굳건하게 내려오고 있다.

다른 유럽 나라들과 특이한 점은 편집국장급과 논설위원들, 부장급들 기자들 중에서 박사학위 소지자들이 많은 현상이다. 이런 점은 언론인들과 신문의 합리성과 지성, 권위와 존경을 부여하는 요소가 되고 있다. 반면에 책임 있고 정의로운 언론이 요구되는 요소이기도 하다.

(6) 오스트리아 국민들의 높은 정치수준이 이 나라의 정치안정을 존재케 하는 큰 이유이다. 예를 들면, 비엔나 2대 일간지에 발표되는 독자의견이나 댓글은 참으로 예의가 있고 합리적인 이론과 지성을 동원한 것들이 많다. 풍자가 있을 지은 정 옥설이나 막말은 없다.

국민들의 정치의식의 수준이 높기 때문에 정치인들은 국민여론이나 여론조사에 매우 민감하다. 오스트리아에 15년 살아오면서 신문에 문제가 되는 정치인의 부패를 보면 한국의 것에 너무나 비교가 되지 않은 소규모의 것들이다.

예를 들면, 사민당의 당수로 국민당과의 연정을 이끌던 알프레드 구젠바우어 전 총리는 가족들과의 여름휴가에서 국립항공사 직원이 부인의 좌석을 일반석에서 비즈니스 클라스로 올려주는 것을 보고도 묵인했다는 것으로 시민들의 비판에 직면, 총리 직에서 사임했을 정도이다.

브리깃테 비어라인 여성 총리 내각 기념 사진

맺는 말

‘이비차 게이트’가 안고 있는 문제들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직 아니다.

첫째로 이비차 게이트의 당사자들인 하인츠-크리스티안 슈트라헤 전 부총리와 요한 구데누스 전 자유당 부 당수에 대한 검찰의 수사가 어떻게 진행될지 아직 미지수이다.

둘째로 ‘이비차 게이트’ 배후의 세력들과 인물들에 대한 투명성, 그리고 이번 폭로사건의 목적규명이 아직 이룩되지 않고 있는 점이다. 자유당측은 국제 사회민주주의 세력과 자본주의의 외국세력이 민족주의적이며 우익적인 자유당의 붕괴를 위하여 꾸민 음모라고 해명하고 있다.

슈트라헤 부 총리와 세바스티안 쿠르츠 전 총리는 외국정보원의 개입가능성과 혐의에 대하여 언급했다. 이들이 언급한 이름 중에는 이스라엘 정치고문으로 2017년 선거 때 사민당의 정치고문으로 고용되어 ‘더러운 선거 전략’을 구사, 물의를 일으킨 것으로 알려진 탈 실버슈타인(Tal Silverstein)이 있다.

‘이비차 게이트’의 배후에는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전직 형사들과 정보원, 변호사, 자유당 인사들이 많이 언급되고 있다. 복잡한 구도이다. 이 구도들이 투명하게 밝혀질 것인지, 어떻게 될지에 따라 사건의 여운은 계속 작용할 것이다.

셋째로 자유당의 러시아 커넥션의 존재와 러시아의 영향확대가 오스트리아 정치에 앞으로도 직접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비엔나에는 러시아의 과두정치적인 부호로 알려진 콘스탄틴 말로페예브(Konstantin Malofejew)가 창립한 한 협회가 있다. 이 협회에는 러시아 네오파시스트 알렉산더 두긴을 비롯 오스트리아 자유당의 슈트라헤 전 당수와 요한 구데누스 전 부 당수 등이 회원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보도에 의하면, 2016년 12월 말 하인츠-크리스티안 슈트라헤 당수는 자유당 대표단을 이끌고 러시아를 방문,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연합 러시아’당과 가까운 교류를 포함한 상호협력서를 체결했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자유당은 러시아로 부터 정치자금을 받고 있다는 확인되지 않은 의심을 받아 왔다.

오스트리아의 고위직 정치은퇴자들이 러시아 국영기업의 이사로 등용되고 있는 점이 보도되고 있다. 국민당 출신 볼프강 쉿셀 전 총리와 국민당 출신 한스외르크 쉘링 전재무장관이 러시아 국영 가스 회사 가즈프롬(Gazprom)고문들로 임명 받았다. 사민당 출신 크리스티안 케른 전 총리는 러시아 국영 철도회사의 고문으로 옮기게 되었다.
넷째로 오는 9월 총선을 통하여 어떠한 정부가 들어서서 ‘이비차 게이트’를 어떻게 마무리 짖느냐 하는 문제가 끝으로 남는다.

보수 국민당은 세바스티안 쿠르츠 전 총리를 톱 후보로, 진보 사민당은 파멜라 렌디-바그너(Pamela Rendi-Wagner) 여 당수를 톱 후보로, 상처가 큰 자유당은 노베르트 호퍼 새 당수를 톱 후보로 각각 내세우고 선거전에 임하고 있다.

국민여론은 집권당이었던 국민당을 여전히 지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연정 파트너였던 자유당은 타격을 좀 받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전 당수와 전 부당수의 언행이 도시 시민들과 언론의 분노를 야기 시켰으나 보수적인 지방, 농촌의 여론은 2년 전 총선 전의 언행이고, 연정의 자유당은 지방, 농촌의 보수층을 위해서는 유익한 정치를 했다고 보는 것이다. 즉, 자유당은 보수층이 싫어하는 이스람 세력의 확장을 방지하는 조치로 비엔나 이스람 압둘라 센터를 폐쇄했고, 농촌에 유해한 잡초 제거 화학제의 사용금지, 물 원천의 개인 소유화를 방지하는 정책을 실시하는 공적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런 지지에도 이번 사건의 타격은 연방의회에서 현재 1석 차이로 사민당 다음의 제 3당으로 있는 폭을 넘어 서지 못하고 의석을 좀 잃을 것이란 전망들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자유당은 분위기를 일신하기 위하여 유럽의회 의원으로 당선된 하인츠-크리스티안 슈트라헤 전 당수에게 그 자리마저 사퇴케 하고, 부인 필립파 슈트라헤를 비례대표 제 3번으로 내 세워 “이비차 사건은 끝났다”며 새로운 관심과 인기를 모우는 선거전을 펴고 있다.

사민당은 2017년 총선실패 책임론을 둘러 싼 지도층의 분열로 당의 단결을 이룩하지 못해 고전 중이었다. ‘이비차 게이트’를 맞아 역전의 계기와 당의 단결을 이룩하는 전략을 세우고 총선에 나서고 있다. 마침 여성 총리 팀이 이끄는 ‘여성내각’이 인기를 얻게 되자 렌디-바그너 여 당수를 차기 총리 후보로 크게 내 세우면서 진보적 국민들과 여성표 몰이에 전력하고 있다.

소수 정당과 정파로서는 이번에 내각 총사퇴를 주도한 ‘리스트’(페터 필즈 대표), 진보적 보수를 표방하는 ‘네오스’(신당), 2017년 총선에서 남성 지도자들과 여성 지도자들의 분규로 남성지도자들이 탈당, 연방의회의석을 모두 잃어버린 녹색당이 자유당의 의석 탈취를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아마 국민당과 사민당의 제1, 제 2 당 고수로 국민당-사민당 대연정이 다시 탄생하여 ‘이비차 게이트’로 맞은 오스트리아의 정치적 위기를 마무리 지을 것이 아닌가, 앞으로의 전망을 이같이 내다본다.

글 김운하 편집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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