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영성을 주제로 건축 특별전을 선보이는 승효상 이로재 대표

승효상 이로재 대표

우리나라와 오스트리아가 인연을 이어 오며, 두 국가가 간의 우호와 교류에 영향을 끼친 인물들이 여럿 있을 것이다. 그 중에는 건축가인 승효상도 있다. 비엔나에서 2년이라는 다소 짧은 거주기간에도 불구하고 그가 끼친 영향력은 자못 높다. 빈 공과대학에서 객원교수를 지내기도 했으며, 오스트리아 정부가 수여하는 훈장을 아시아인으로서 최초로 수여받기도 했고, 오스트리아 한인문화회관 리모델링을 맡기도 했다.

그러한 그가 한국인으로서 또 건축가로서는 처음으로 건축에 대한 특별전을 Künstlerhaus에서 선보이고 있다. 그가 1989년 설립한 건축 설계사 이로재의 대표로서 작업한 여러 작품들 중 16개의 프로잭트를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고 있다.

이번 특별전과 오스트리아와의 인연을 인터뷰하기 위하여 승효상 대표를 만나러 Künstlerhaus를 찾았다. 묵상을 위하여 마련 된 듯한 의자에 앉아 기다리던 승 대표는 필자를 반가이 맞이하고는 전시공간 가운데 위치한 독락당으로 안내하며 좌담을 이어갔다.

전시장 전경
묵상을 위하여 마련된 의자 위로 이로재 현판이 보인다.

• 반갑습니다. 대표님. 이번 특별전을 저는 오픈식 때 잠깐 살펴보고서도, 인터뷰에 응하기 전 몇 차례 다시금 방문해 둘러보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잔잔하고도 깊은 감명을 받았사온데, 어떤 계기로 이 전시를 기획하게 되셨는지요?

계기라 하기 보다 운명이라 생각하는데(웃음), 제가 비엔나와 인연이 깊어요. 빈 공대의 한 교수님이 이 미술관의 건축분야 담당 위원장으로 계십니다. 그가 건축에 대한 전시를 하자고 저를 초대하고, Künstlerhaus에서도 좋다고 하여 이 특별전을 꾸리게 되었습니다.

차를 내는 승효상 대표

• 이미 많이 알려진, 유홍준 국립중앙박물관장님을 위해 설계하신 수졸당을 비롯하여 제가 제주를 방문할 적이면 필시 들르는 추사관과 같은 대표님의 작품들을 제외하고. 이 특별전에서 선보이는 작품들을 선별하신 기준이나 이유가 있으신지 여쭙습니다.

지금 전시된 작품들은 모두 16개의 프로젝트들로, 지난 15년 사이의 최근작으로 골랐습니다. <영성의 풍경>이라고 하는 책을 얼마전에 새로 펴냈는데, 제가 생각하기로 우리 현대인이 갖고 있는 큰 문제 중 하나가 ‘영성 상실’이라고 봤습니다. 그래서 그 영성과 관련된 건축을 주로 모아 선보이는 전시라 할 수 있어요.

• 사유원의 건축작품들이 전시장 한쪽 벽면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연유에서 일까요?

중요하죠. 사유원은, 처음 의뢰를 받고 상의할 때부터 일반적인 수목원이 아닌, 현대인이 잊어버린 사유와 성찰을 할 수 있는 곳을 만들자. 그러한 수목원을 만들자고 했었어요. 그래서 이름까지도 사유원이라 짓게 되었습니다. 마스터플랜을 직접 짠 것은 아니지만, 처음부터 상의해 가며 만들었습니다. 근데 이름이 사유원으로 정해지니, 시설들도 거기에 따라 기능을 갖게 되었습니다. 성공적으로 된 프로젝트라서, 전시장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어요.

사유원 전시 부스를 살피는 승효상 대표

• 이번 전시를 통해서나, 선생님의 저서 등에서 ‘추방’이라는 단어가 눈에 자주 듭니다. 어떤 이유에서 일까요?

사람들이 대게 자기 입장만을 가지고 사는데, 가끔 자기자신을 떠나서 자기가 어떤 처지에 있는가를 볼 필요가 있잖아요. 자기를 알기 위해서는, 여행을 가보면 알 수 있듯이. 여행지에서는 어쩔 수 없이 삼자적 입장이 될 수밖에 없으니, 거기 시는 사람들의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잖아요. 그렇듯이 우리가 일상생활을 할 때에도 자기를 타자화시켜서 삼자화시켜 자기를 보면은, 그 삶이 바른지 혹은 잘못된 길을 가고있는지 알 수가 있지요. 그래서 항상 스스로 추방하는 삶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그 이야기를 자주 했습니다.

전시 중, 에드워드 사이드의 문장

• 전시장 가운데에 독락당이 있습니다. 실제 지어진 집의 재현인지요?

아닙니다. 이 전시를 위해서, 가지고 있던 생각을 토대로 지었습니다. 현판글씨도 제가 직접 썼어요. 이 전시공간의 전체 크기에 맞춰서 만든 것이고, 본래 전시 끝나고서 없어질 집이었는데 가져가겠다고 하는데가 생겼습니다.

사실 또 제가 71학번이라서, 우리 때는 학교 교육을 제대로 못받았어요. 그래서 주로 옛날 건축들을 통해서 굉장히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런 고건축을 이해하려면 그 건축을 만든 사람들의 사상, 생각을 추적해야 되니까. 자연히 독락이라는 말도 알게 되고, 경주의 독락당이나 안동의 병산서원, 도산서원도 가보고. 그 건축과 건축을 만든 사람이 가진 생각을 읽아가면서 익혀가는 바람에 제 건축에 일부가 되었죠.

• 그럼 그렇게 자연스레 동양건축적 요소들이 선생님의 건축에도 투영된 것일까요?

그럼요. 제 DNA가 한국인이니. 우리가 그동안, 60년대 후반부터 서양화의 물결 속에 파묻혀 있지만은 우리의 DNA는 없어지지 않으니까. 오히려 파묻혀 있는, 우리 휩쓴 물결이 부담스럽지. 다시 이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DNA를 다시 끄집어내고 그에 맞는 공간 형식을 찾는 게 우리에게 더 맞는 삶이라고 생각을 했기 때문에 계속 공부를 하고 있는데, 지금도 공부하고 있어요.

전시장 가운데 지어진 독락당
전시 중, 독락의 의미

• 선생님 말씀 중, 건축은 불편해야 한다는 말씀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삶이 매우 혹은 지나치게 편리해진 현대인들에 큰 귀감이 된다 생각합니다. AI가 세상을 선도하는 오늘에 덧붙여 주실 말씀이 있으실까요?

기능적이라고 하는 말은 원래 건축에서 없던 말이에요. 기능적 건축이라고 하는 것이 언제 생겼냐면은, 스페인 독감이 전 세계를 휩쓸었을 때 수천만 명이 죽었죠. 그 이후 이러한 질병이 아주 과도하게 밀집된 도시 환경에서 비롯됐다고 하는 걸 알고, 도시를 재편하기 위해서 건축가들이 아테네에 모여 아테네 선언을 했는데 그때 기능이란 말이 처음 나와요. 도시를 기능적 효율적으로 만들자고 하면서, 도시를 거주/교통/업무/여가 이렇게 네 부분으로 구획을 해요. 그리고 그게 이제 오늘날 주거적 상업적 공업적 등등의 시발이 되었는데, 그때 기능 기능적 건축이라는 말이 나왔고. 당시는 산업화에 접어들어 주로 공장 생산을 해야 되니까, 동선도 짧게 만들고 효율적으로 만들고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도시 또 가장 좋은 건축이라고 인식이 되었었지요.

그런데 우리 삶이라는 것이 어떻게 기능적인가? 우리 마음, 정신이 기능적인 것이 아니니까. 우리 삶에 기능이라는 말이 맞는 것 같지가 않아요. 가장 기능적이라는 집이 아파트인데, 요즘 한국의 아파트가 그래요. 이게 주차장에 주차해 놓고 엘리베이터 타고 자기 집으로 들어가서 문 닫고 하면 옆집 사람이 죽는지 사는지도 모르고 그래요. 집안에서도 그래요. 거실하고 부엌을 가장 가깝게 만들고 뭐 걸을 필요도 없이, 그냥 버튼만 누르면 전부 다 되게끔 돼 있는 이 기능적인 집에서. 가족끼리 그렇게 유대가 잘 될까? 옛날보다. 옛날에는 안방 건너방 다 떨어져 있는데도 저 안에서 뭘 하고 있는지 짐작을 했는데, 요즘은 자녀들이 방문 잠구고 들어가면 뭘 하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아주 절련의 시대가 된 게 바로 이 기능적 건축에서 배웠던 거거든요.

물론 공장이나 이런 생산적 건축은 기능적으로 필요하지만, 우리가 우리가 공장 같은 건축에서 살지 않으니까요. 우리의 삶이. 그래서 이런 측면을 다시 되짚어야 된다. 불편한 게 오히려 우리를 더 건강하게 만들 수 있다고. 누가 집에 오면 자기는 소파에 앉아 있고 버튼만 눌러서 맞이하는 게 아니라, 누가 오면 일어나서 걸어서 가서 문 열고 사람 만나는 것이, 이렇게 왔다 갔다 하는 게 훨씬 더 건강한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 또한, 건축은 기술도 예술도 아닌 인문학이라 하셨습니다.

아주 기본적인 이야기인데. 생각해보면 우리 인류가 생겨나고 집이 먼저 생겼지, 기술이나 예술은 그다음에 생긴 거죠. 기술이나 예술이 없던 시절에도 집은 있었단 말이에요. 그걸 좀 더 잘 짓기 위해서 예술이나 기술이 생긴 것이죠. 기술이나 예술은 부차적인 것이지, 본질적인 게 아닙니다. 본질적으로 건축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 또 잘 살 것인가를 가지고서 그 바탕을 만들어 주는 게 건축이니까.

건축 설계를 한다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삶을 다른 사람 집을 짓는 것이니까, 다른 사람이 어떻게 사는지를 잘 알아야 될 거 아니에요. 그러면 모든 것을 직접 가서 볼 수가 없으니까, 소설책을 보거나 영화를 보고 알아야 되고. 어떻게 산지를 알기 위해서는 역사도 공부해야 되고, 왜 사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철학을 공부해야 되고. 이러니까 문학 역사 철학이 인문학의 기본이니까. 초기 설계는 이런 인문학에서 출발하는 게 맞다고 봐요. 기술이나 예술은 그 다음의 문제라고 할 수 있죠.

<무제>

• 서책들을 많이 소장하신 것으로 알고 있고 또한 집필도 못지않게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번 전시를 둘러보면서도 작업하신 작품들과 연계하여 책들을 많이 펴내신 것을 보았는데, 건축가로서 이러이 책을 많이 펴내시는 연유가 있으실까요?

책 살 때마다 미안한 게, 너무 싸요. 그래서 보통 책 사면 서너 권을 사요. 선물하기도 하고요. 책 한 권은 그 사람의 인생 전부가 들어 있어요. 필생의 역작이라고 하는 말이 거짓말이 아닌데. 책 한 권에 몇 만원이라는 것이 너무 싸다고 생각합니다. 책 한 권은 어떤 세계 하나가 다 포함되어 있는 거니까. 책 한 권을 읽는다고 하는 것은 한 사람 한 집단의 세계를 다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니, 너무나도 효율적인 것이죠. 효율적으로 지혜를 습득하는 방법인 것이죠.

건축가로서 독립했을 때, 내 건축을 하기 위해서. 건축을 하는 방법이 많잖아요. 여러 가지 방법들이 많은데. 이 자유분방한 건축 세계에서 나를 한정시킬 필요가 있었어요. 나는 이것저것 하지 않는 건축가가 되겠다고 생각해서 맨 처음 펴낸 책이 <빈자의 미학>이란 책인데. 이 책을 내면서, 나는 어떠한 건축을 하겠다고 여기에 다 써 놨어요.

써놓고 보니까, 써놓은 것에 또 해명을 해야 되니까 해명을 위한 글도 써야 되고. 그리고 실천을 해야 하고 또 실천에 대해서 변명도 써야 되고, 이게 왜 ‘빈자의 미학’하고 관련이 있는가를 구체화 변명해야 되다 보니까 계속 글을 쓰지 않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건축가로서는 아주 드물게 유난히 책을 많이 펴낸, 작가가 되고 말았는데. 그러니까 자꾸 변명의 변명을 거듭하는 겁니다. 책을 쓰는 게, 기발한 생각을 가지고 남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한 게 아니라, 내 잘못을 다 덮기 위해서 변명하기 위해서 한 결과로, 책을 많이 낸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무제>

• 오스트리아와의 인연을 또한 논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빈으로 유학을 나오신 계기와 그 시절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학위를 목표로 왔다기 보단, 1980년대 암울했던 한국사정을 피해서. 두렵기도 하고 도망 나오듯이 나온 데가 여기 빈입니다. 맨 처음에는 어디로 가야 될지를 잘 몰랐어요. 당시 제가 설계에 참여했던 마산성당의 주임 신부로 파견 나오신 요제프 프라츠 신부님이 계셨어요. 그라쯔에서 오셨는데, 우리네 이름으론 박기홍 신부님이라 불립니다. 그분과 친하게 지내면서 술도 같이 마시고, 그러다 제 고민을 아시고는 비엔나로 가라고 이야기를 하셨어요. 그래서 신부님이 입학 허가서도 받아주고, 거처도 마련해 주시고 하셨어요. 이후로 여기서 결혼도 하고 애도 낳고 밥벌이를 해야 돼면서 학위는 그만두고 취직을 했었어요.

뿐만 아니라 당시에 건축가 ‘아돌프 로스’라고 하는 사람을 만나게 돼었어요. 작품으로 만나고 책으로 만나고. 그런데 그것이 건축을 새로 시작을 하게 된 계기가 되었어요. 건축을 새로 시작해야 되겠다는 생각에서, 더 이상 비엔나에 있지 않고 그렇게 돌아갔죠.

• 제가 현재 지내고 있는 빈 7구의 어느 수도원에서도 몇 개월 간 지내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은 이름이 바뀌었더라고요. 그때는 라짜리스텐 크로스트라고 그랬어요. 성나자로 수도원. 그때는 그곳이 은퇴한 신부들의 마지막 거처였어요. 거기에 방을 하나 얻었었는데, 죽기 직전의 신부들이니까 검은 옷만 입고 말 없이 왔다 갔다 하는 게 마치 내가 미라 속에서 사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밥 먹을 때 보면은, 긴 식탁에 서로 앉아서 서로 말도 안 하고 밥을 먹는데 그 속에 끼어 앉아가지고는. 소세지만 주고. (웃음)

• 빈 공과대학에서도 교수직을 지내셨습니다.

2017년에, 37년 만에 객원교수로 초대받고 와서 첫 번째 강의를 하는데, 눈물 나려고 하더라고요. 37년 전에 학생으로 와서는 그렇게 그냥 쭈그리고만 살다가 37년 후에, 거의 같은 교실에서 학생들을 앉혀 놓고 강의를 하려니까 감계가 무량해 가지고 그랬어요. 근데 또 그 강의에 제가 일했던 사무소의 보스가 오셨었어요. 나중에 따로 뭘 보여주냐면은, 제가 그 사무실 가서 처음 그렸던 투시도가 있어요. 나는 다 잊어버리고 었는데, 그 투시도 카피를 들고 오셨어요. 너무 놀래가지고. 건물이 완공되었다고 해서 또 가보니까 투시도와 똑같더라고요.

전시 전경

• 오스트리아 한인문화회관 리모델링을 또한 맡아주셨었었습니다.

그 일은, 처음에 부탁 받을 당시 설계비는 드릴 수 없지만 비엔나와 인연이 있으니 설계를 해 주십사 해서. 망설이는데 일 초도 안 걸렸어요. 아, 내가 해야지. 나한테 좋은 인연이 있는 곳인데.
그러고서 보니, 원래 있던 건물도 워낙 좋고 위치도 좋고 그래서. 크게 뜯어고칠 게 아니라, 조경을 위주로 많이 고쳤어요. 만들고 나니까 비엔나 문화재 담당하는 데서도 잘 고쳤다고 칭찬도 듣고, 문화재로 등록도 다시 하고 그랬어요. 그런데 자금이 넉넉치 않았던 데니까, 1단계만 공사를 해서 조경은 공사를 다 못했어요. 조경쪽은 또 정현선 대표님이라고 유명한 분께서 하셨는데. 그래서 돈이 좀 모아지면 조경 공사를 좀 해달라고 부탁을 했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더 근사한 건물이 될 거예요.

• 훈장 이야기를 빠트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번 특별전에도 전시가 되어있는데요. 선생님과 같이 오스트리아에서 유학하는 일인으로서 또 한인으로서 자부심을 느낍니다. 이 자리를 빌어 축하 드립니다. 오스트리아 한인사회에는 달리 크게 소개된 적이 없어 이 지면을 빌어 소개하고 싶사온데, 어떠한 종류의 훈장인지 어떤 계기로 오스트리아 정부에서 수여하게 되었는지요? 자랑해 주셔도 좋습니다.

알기로는 오스트리아에서 두 번째로 격이 높은 훈장이에요. 아시아인에게는 저에게 처음으로 수여한 것인데, 우리로 치면 은관문화훈장 정도 될 겁니다. 이 훈장을 또 프랭크 시나트라도 받았고, 작곡가 아르보 패르트도 받았고 해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다 받았어요.

사실 나도 왜 나한테 줬는지 아직 몰라요. 당시 오스트리아 대사가 엘리자베타 대사였는데. 그 분이 오랫동안 지켜보고, 제가 비엔나를 왔다 갔다 교류하는 것도 알고, 한국에서도 뭐 덜 유명하지 않으니까. 그래서 아마 오스트리아하고의 관계를 좀 더 강화하기 위해서 정책적으로 준 것 같아요. 굉장히 엄청난 거죠. 굉장히. 나한테는 과분한.

오스트리아 정부로부터 수여받은 학술예술 1급 십자훈장

• 저는 개인적으로 한국에 갈 때면 항시 들르는 장소들이 있는데, 안동의 도산서원만큼은 무슨일이 있어도 필히 방문합니다. 외로도 서울의 종묘와 창덕궁, 소쇄원 … 여타 박물관과 미술관 그리고 영주의 부석사 등이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도 빈이나 유럽에 들리셨을 때에 필시 방문하시는 곳이 있을까요? 이 지면의 독자들에 빈과 유럽에 숨은 명소와 추천하시는 그 연유를 여쭙습니다. 한국의 건축도 좋습니다.

무덤. 무덤을 주로 찾습니다. 이를테면 중앙묘지에 아돌프 로스의 무덤이나. 또 무명인을 위한 무덤이 있잖아요. 이름 없는 자의 무덤. 뭐 가서 이야기도 좀 하고.

서울에서는 종묘를 가봐야죠. 서울이 그래도 존속하는 이유가, 종묘가 있어서 나는 존속한다고 생각하니까. 종묘는 한 오후 3시 반쯤 가는게 좋아요. 아무도 없어. 다 나가고. 종묘는 아무도 없을 때 혼자, 정전 마당 바닥에 그냥 딱 서서 있으면…

• 그럼 끝으로, 여기 오스트리아의 한인들과 지면을 통해 만날 오스트이아인들에 인사말씀 부탁 드립니다.

나는 그런 말을 제일 잘 못해요. (웃음)

대담 중의 승효상 대표와 필자

본 특별전 <ARCHITECTURE & WORDS>는 11월 23일까지이며, 10시부터 18시까지 무휴로 개관한다. 전시를 마치는 23일까지 매일 14시부터 승효상 대표가 전시공간을 지킬 예정이다.

  • 장소: Künstlerhaus Karlsplatz 5, 1010 Wien
  • 전시정보: kuenstlerhaus.at/besuch/kalender/ausstellung/479/seung-h-sang.html

기사제공: 새로운 한국 오스트리아 (박민우 보도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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