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한글학교 소식] 비엔나한글학교 교장의 직을 섬기면서 – 한성애 교장

비엔나한글학교 한성애 교장

비엔나한글학교 교장의 직을 섬기면서, 그리고 내 인생의 소중한 스승을 기억하며..

성애야, 국어책 읽어볼래?”

 

쉬는 시간이 되면 주변의 동급생들이 책상이며 의자를 우당탕 소란스럽게 넘나들며 당시 대구에서 서울로 갓 전학 온 상고머리의 촌스러운 제 앞으로 어김없이 앞다투어 모여들었습니다. 부친의 근무지를 따라 초등학교 2~3학년의 과정을 대구의 국민학교에 다니다가 다시 돌아온 서울의 예전 학교 친구들은 그저 제가 교과서 내용 중 한 줄만 읽어도, 깍쟁이 서울 억양과는 사뭇 다르고 흡사 대구 국밥집 냄새를 폴폴 맡게 되는지, 저마다 배꼽이 달아나지 않게 쥐느라 진땀을 흘렸습니다.

돌이켜 보니, 저는 이미 어려서 일찍부터 ‘외국어’를 습득하며 살아야 할 환경에 익숙해져 있었나 봅니다. 초등학교 2학년이 되면서 대구로 내려갔던 그때는 한동안 서울말 쓰는 깍쟁이라서 ‘서울내기, 다마내기’라는 놀림을 좀 받았던 때도 있었는데, 이후 4학년이 되어 돌아온, 그것도 태어나 자란 서울 동네에선 다시 대구 수성시장의 따로국밥이 되어 있었으니 말입니다.

물론, 저는 이렇듯 주변의 관심을 끄는 것이 전혀 싫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까짓 교과서 문장 몇 개 큰소리로 읽는 것으로 친구들에게 눈물을 쏙 빼는 웃음을 선사하는 일은 무척 즐겁기까지 했었습니다. 남자 형제들 틈에 자라느라 동네 ‘이발소’까지 함께 이용하면서 뒷꼭지만 봐서는 “우이동 한 씨네 삼 형제 중 둘째 아들”로 늘 오해받던 촌뜨기였던 저로서는 이런 인기몰이가 참 신선한 즐거움이었습니다.

아마, 몸에 밴 국밥 냄새도 제법 빠지고 대구 억양으로 국어책을 읽어주는 것 역시 동급생들에게 많이 식상해졌던 때라고 생각이 되는 어느 날, 당시 국민학교에서는 의례, 하교 전 교실 청소가 오롯이 학생들 몫이라 비발디 사계의 봄 음악이 교실 확성기로 흐르면 자동적으로 다 함께 의자를 책상 위로 올리고 무언가에 홀린 듯 청소를 시작하려던 그 때였습니다. 담임선생님께서 제게 4학년 주임 선생님께서 저를 잠시 만나고자 하시니 복도에 나가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오호라, 청소에서 열외 된다는 기쁨으로 교실 밖 복도로 나가보니, 우리 학년 호랑이 주임 선생님께서 저를 기다리고 계셨는데, 기대와는 달리 그저 제 신상과 일상에 관한 몇 가지 질문을 하시고는 다시 담임선생님을 뵙고자 하셨습니다. 하긴, 겁이 많은 저로서는 예나 지금이나 애써 금지된 일을 굳이 실험적으로 나서 하면서나 느낄 수 있을 만한 짜릿함보다는, 말 잘 듣는 착실한 학생으로 가끔씩 머리를 쓰담쓰담 해 주시는 어른들의 칭찬을 훨씬 선호하는 편이라, 아무리 호랑이 주임 선생님이라고 할지라도 꾸지람 받을 만한 일로 보자 하셨을 리 만무했으나, 그래도 참 싱거운 대화였다는 생각으로 돌아섰던 건, 대화 중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르고, 행여 남은 청소 시간에 다시 참가해야 할 것 같은 허탈한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는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서려니까 마치 시험이라도 치르려는 듯 반듯하게 모두 제자리에 앉아 있던 친구들의 시선이 일제히 제게 쏟아졌던 것에 우선 놀랐고, 오히려 제가 저도 모르는 시험을 보고 왔으니, 이 시험 얘기를 친구들 앞에서 해주겠냐고 물으시는 담임선생님의 말씀이 너무 의아해서 저절로 눈이 커지는 것이었습니다.

이 순간 저는 우리 4학년 단일 학년만, 천 명이 넘어가고 전교생으로는 약 6천 5백 명에 달하는 우이 국민학교에서, 단 한 명의 유일한 4학년 여자 대표 연사로 라디오 방송 출연에 선발되고 있었습니다.

이후로도 저는 몇 차례 더 타 방송사의 어린이 프로그램에 출연할 기회를 얻었는데, 당시 전국의 초등학교를 돌며 꽤나 유명했던 프로그램을 이어가던 뽀빠이 이상용 아저씨가 우리 학교를 방문했던 때는 정확히 기억나는 방송 내용은 없어도 저의 무척이나 유쾌한 입담으로 뽀빠이 아저씨 배꼽까지 가출시키고는 단번에 학교의 유명 인사가 되어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그저 어쩌다 하루 교실 청소에서 해방된 일탈의 기쁨인 줄로만 알았던 그날의 경험이, 향후 제 자신이 스스로를 인식하는 데 있어서 얼마나 큰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는지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올해로 꼭 30년 전 1991년 재오스트리아 한인회의 가장 큰 연중행사 “송년의 밤”에서 그해 6월 유학길에 올라 오스트리아로 이주해 왔던 제가 이 행사의 사회를 1992년까지 연이어 두 차례 맡았던 일을 기억하시는 분은 아마 그다지 많지 않으시리라 생각됩니다만, 이렇듯 제 어릴 때 경험은 참 오래도록 저를 유쾌하게 많은 사람들 앞에 세워 주었습니다.

짐작건대 저는 실체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어떤 “끼”를 아마 마음 깊은 곳에 묻어두고는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도록 너무 잘 포장한 나머지 스스로도 감춘 곳을, 아니 묻어 두었다는 사실조차도 잊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너무 밝은 천성 탓에 저의 천하는 대부분 태평하였으니 “터진 팥 자루”마냥 연신 웃음 나는 어린 제 일상은 그 시절 너나 할 것 없이 대부분 가난했던 환경에도 참 행복한 어린이였고, 무엇보다 내재된 무엇을 발견하려고 굳이 애를 써야 하는 심오한 자기성찰 같은 것을 하기엔 지나치게 미성숙했었습니다.

“내 이름은 말이야, ‘신’자 하나로 세 글자를 모두 다 쓸 수가 있어서 절대 잊어버릴 수 없을 거야.”
“자 봐! ‘신’자에다가 줄 하나 더 그으면 ‘진’이 되지? 그리고 또 이 ‘진’자에다가 줄 몇 개 더 그으면 ‘철’자가 써지지! 어때? 내 이름은 신. 진. 철. 이야!”

예언하셨던 선생님의 말씀처럼 저는 지금껏 선생님의 성함을 잊지 않고 있고, 저를 제 인생의 첫 방송 출연 시켜 주셨던 그 경험으로 인해 오늘에 이르기까지 사람 많이 모인 무대가 즐겁고, 우리 인생이 또 하나의 무대라서 저는 그 앞에 서는 것이 전혀 두렵지 않은 것임을 일찍부터 배울 수 있었습니다. 물론 배움에는 끝이 있을 수 없는 터라 오늘에 이르기까지 저는 참 많은 스승을 모셨고, 지금도 삶의 지혜를 배우는 많은 선생님들을 주변에 두고 있어서 그 기쁨과 감사를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비엔나한글학교를 섬기고 또 교장의 직을 섬긴 지 10년의 세월을 채우는 동안 저는 우리 학생들에게 어떤 선생님이었을지 몹시 궁금합니다. 다만 제가 진심으로 바라고 소망하며 애써 노력하는 한 가지가 일찍이 제 스승께서 제 안의 숨은 자신을 깨워 주셨던 그 경험을 나누고자 하는 것입니다.

저에게는 스승의 혜안이 없어서 학생들의 마음을 일일이 들여다볼 능력은 없지만, 우리 학생들 개개인 모두에게 귀한 가치와 가능성이 내재되어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음으로 어떠한 재능으로 표출될지 신비의 눈으로, 설레는 마음으로 무엇보다 외국에서 성장하는 우리 학생들이 자신의 뿌리를 기억하고 이러한 문화적인 차이를 커다란 자부심으로 키워주기를 끊임없이 축복하고 또 축복합니다! 그래서 세월이 많이 지난 또 어떤 날에는 비단 대한민국과 오스트리아 사회를 이끌게 될 우리 학생들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누구라도 저와 함께했던 한글학교의 시절을 잊지 않고 그저 귀히 여김 받았던 추억으로 인해 행복했던 한글학교를 기억해 주기라도 한다면, 저는 이 직을 섬기는 오늘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허투루 가벼이 여길 수는 없습니다.

나름대로는 친구들의 마음을 들여다보기 위해 학교에서 만나는 학생들과 일일이 눈을 마주치려고 애써왔던 일이 지난해 3월 학기부터 코로나로 인해 불가능해져서 지금껏 마음 아픈 일로 남아있지만, 어느새 저 역시 “라떼” (나 때는 말이야…) 세대가 되어 있음을 하마터면 눈치채지 못했을 뻔했던 찰나, 다음 세대에게 최적화된 학습환경으로 서둘러 전환하는데 겨우 성공할 수 있었으니 이 또한 얼마나 감사한지요!

2021년, 비엔나한글학교가 지난해 40주년을 기념하고 또 다른 역사를 시작하면서, 교장의 직을 겸손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섬기기 위해 제 인생의 스승들을 기억하며 그 가르치심과 배움을 나누고 전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고자 새롭게 다짐합니다!

 

글 한성애 비엔나한글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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